8월에 연방 신청서를 제출하고 승인 소요 기간이었던 4주가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6주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연방에 문의를 넣었다. 마지막 연방 승인만을 남겨둔 시점이 오고 영주권의 끝이 보이자 시간은 한없이 더디게만 갔다. 4개월이 되어가는데도 소식이 없자 연방에 한 번의 문의를 더 넣어두고 그렇게 어느덧 12월이 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여기저기 훈훈한 광경이 펼쳐졌다. 'Pay it forward' 시즌이 온 거다. 평소에도 소소한 선의는 오가지만 연말이 되면 너도나도 따뜻한 선행에 동참한다. 커피숍을 가면 뒷사람의 커피값을 대신 내주기도 하고, 식당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밥값을 계산해 주고 가기도 한다.
Pay it forward: 선행의 수혜자가 원래 선행을 베푼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가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 아이를 데리고 긴 줄을 서 볼을 만드는 가족을 본 한 손님이 그 가족의 식삿값을 모두 계산해 준다. 목말을 타고 있던 아픈 아이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천사의 선의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노부부의 밥값을 계산한다. 늘 일이 바쁜지 애매한 시간에 와서 혼자 후다닥 식사를 하고 가는 단골손님은 15불밖에 안 되는 식삿값에 100불을 선뜻 내어놓으며 남는 돈은 필요한 분들의 식사비로 써달라 한다.
나비효과처럼 퍼져가는 선행을 보며 마음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던 그 시기, 우연히 내 급여명세서를 본 언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언니는 경제적으로 늘 빠듯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2주마다 받는 페이로는 내 몫의 한 달 렌트비와 생활비를 맞출 듯 말 듯했고, 한국 계좌에서 다달이 돈을 빼 용돈과 계좌 잔고(월 계좌 이용료를 면제받기 위해 맞춰야 하는 최소 금액)를충당하고 있었다. 언니는 레스토랑에서 쿡(cook)으로 일하며 나와 비슷한 페이를 받고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세금을 많이 내?"
"세금? 계속 이렇게 빠지는데.."
"뭔가 이상하다. 나랑 웨이지(wage)가 비슷한데 세금을 너무 많이 내잖아."
언니 말대로 급여명세서를 비교해 보니 난 정말 많은 세금을 내고 있었고 실제 받는 금액 차이가 많이 났다. 의구심에 가득 찬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 회계사 통해서 해주는 건데.. 설마 잘못됐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게 일이 계속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 주방 일손이 더 필요해지자 딸의 아들이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들은중학생 같지 않게 키가 컸다.
첫날 쭈뼛쭈뼛 다가와 인사를 하며,
"뭐라고 불러야 해요?"
"뭐라고 부르긴? 누나라고 해. 이쁜 누나!"
단칼에 누나라고 부르라는 딸의 말에 실소가 나왔다.
"아이고.. 시킬 걸 시켜! 엄마랑 동갑내기한테 누나는 무슨 누나. 리암! 이모라고 해~"
리암은 주말마다 가게에 나와 주방에서 재료 준비를 하거나 손님이 만들어 온 볼을 그릴에 볶아내는 일을 했다.가게에 손님이 몰아닥치는 상황이 생기면 주중에도 마다하지 않고 와 가게 일을 도왔다. 주방 일을 하지만 볼을 만들어온 손님이 질문을 하거나 특별한 요청을 해와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쌓은경험 덕분인지손님대응을 제법 잘한다.
단둘이 캐나다로 온 딸과 리암은 세상에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다. 사춘기 남자아이 같지 않게 엄마에게 살갑고 활동적인 엄마를 따라 같이 운동도 다닌다.
겨울이 되어사장님 전가족은 멕시코로 휴가를 떠났다. 딸은 혼자 남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엘리샤, 왜 멕시코 같이 안 갔어?"
"휴식이 필요해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휴식.."
가게를 물려준다는 부모님의 제안에 좋아하던 치과 리셉션 일을 그만두고 왔지만 1년이 훌쩍지나도록 달라진 건 없었다.직원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스케줄을 직접 해야 한다는 사모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가게를엘리샤에게 맡길 의지 역시 없어 보였다.
사고방식이 달랐던 부모님과 의견 충돌이 원래부터 있어왔던 엘리샤는 가게 일을 하면서부딪히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오는 갈등에 직장에서의 갈등이 추가되니 엘리샤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나에게도 뭔가 뒤틀리면 며칠씩 말을 안 하고 못 본 척하던 사장님과 사모님은 그렇게 애지중지한다는 큰 딸에게도 똑같았다.
"블리야, 나도 스시집에서 영주권 받았잖아. 그때 정말 재밌게 일했어. 그냥 직원일 때도 재밌었는데 나중에 매니저가 돼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미세한 변화도 손님들은 다 알잖아.그걸 알아줄 때의 그 행복감이란~
영주권을 받고도 한참을 더 일한게 그곳 주인이 나를 전적으로 믿어줬거든. 우리 리암이도 정말 예뻐하고. 리암이, 그 쪼그만한게 엄마 맘을 헤아려서인지 픽업하러 갈 때까지 울지도 않고기다리고 이집저집 다니면서 넉살도 늘었어.
2호점을 내면서 그 가게를 나한테 맡아달라고 했는데 내가 사고가 났다. 바쁘게 일을 했으니 피곤하기도 했지. 그래도 졸음운전이 웬 말이야.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내 차 가운데 가로수가 턱 하니 꽂혀있고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더라. 차는 폐차했는데 하늘이 나를 살렸지. 감사하게많이 다치지도 않았어. 리암이가 어찌나 울던지,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생각이 들더라. 리암이가 아직 어린데 일찍 철이 든 것도 미안하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치과일을 하게 된 거야.
난 치과일이 정말 좋다. 근데 또 여기 오니까 스시집에서 즐겁게 일했던 생각도 나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거는 역시 나한테 잘 맞아."
"그런데.. 내가 여기 오고 나서 내 위치가 모호해진 것 같아. 원래도 엄마 아빠는 가게 얘기를 많이 했었어. 난 가족 모임에서 가게 얘기만 하는 게 정말 싫었다. 그나마 그때는 내가 질색을 하면자제를 하셨는데 이젠 안돼. 일할 때는 당연히 가게 이야기, 가게를 벗어나도 가게 이야기. 밤늦게 전화해서도 하는 건 가게 이야기.. 가게 가게 가게..
가게에서 있었던 일, 나한테 서운한 감정들을 가족모임에 그대로 끌고 와서 불편하게 하니까 다른 가족들한테 미안할 지경이야. 내가 자식인지 직원인지, 자식이 먼저인지 직원이 먼저인지.."
"엄마 아빠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게 너무 많아. 나를 도대체 가게에 왜 데려온 거야? 가게를 더 키우고 싶어서 나한테 이것 생각해 봐라 저것 생각해 봐라 하는데, 블리야도 알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신메뉴 개발하는 것? 아이디어를 냈으면 시도를 해 봐야지. 해보기도 전에 정색을 하고다 안된데.이런저런 이유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뭘바꾸고 싶기는 한 건가?그럼 뭘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신메뉴 개발은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도 나왔던 이야기다. 나는 요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성의껏이곳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이드 메뉴들을 알아보고, 가게에서 할 수 있는 여력이 된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를 제안했었다. 하지만 모두 '안 되는 이유들'이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 다른 사안에 대해 물어왔지만 의견을 제시하면 방어부터 했다. 처음부터두 분은 가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지금이 최선임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이 모든 과정이 결국열정낭비였고 시간 낭비였다.
재료를 많이 담는 손님들에게 얼굴을 붉히는 사모님과 그 과정에서 언짢아 발길을 끊는 손님들을 보며 '볼 크기'별로'무게에 대한 기준'과 '추가요금적용정책'을 만들고 알린 건 그 와중에 큰 성과였다. 정책이 자리를 잡으면서음식 무게 때문에 불편한 상황이 현저히 줄었고 손님은 오히려 늘었다.
"답답한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어디 가서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밖에 나가서 할 이야기들은 아니잖아. 그래도 내 부모님인데, 내가 어떻게 침을 뱉어.
엄마 아빠와 같이 일하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인 걸까?
엄마 아빠가 가게 일에 손을 떼면 그땐 괜찮아질까?
이렇게 지내는 것, 정말 괜찮을까?
이러다 엄마 아빠를 미워하게 되는 건 아닐까?
블리야는 괜찮아?
우리 엄마 아빠 많이 미울 텐데 어떻게 견디고 있어?"
"나와는언젠가는 끝날 관계야. 영주권 받을 때까지만 견디자 생각하고 털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엘리샤는 다르지. 가족이기 때문에 네가더 힘들 거야."
엘리샤와 나는 같은 신발을 나눠신었다.다른 사람들에게하지 못하는 얘기를 나누며 우린그렇게 서로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같은 신발(in the same shoes): 서로의 입장이 같다는 걸 뜻하는 영어식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