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 이민 컨설턴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덜컥 계약을 해버린 탓에 나는 영주권 과정을 혼자 하게 됐다. 손목치료를 해준 피부관리실 언니가 연방 인비테이션 받은 것을 축하해 왔다. 그리고 이민 일을 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니 참으로 대단타~ 어찌 영주권을 혼자 척척 다하노~ 니 이민 일 안 해볼래?"
"이민 일이요?"
"아는 이주공사 대표가 있다. 내 영주권을 거기서 했는데, 사람 괘않~다. 거기 아가 하나 있는데 일하는 게 영~ 시원찮아가 속을 엄청 썩이나 보더라. 니 안 해볼래? 니 잘할끼다."
캐나다에 온 후 지금까지 알게 된 이주공사 모두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
언니네가 캐나다에 오기 전 고용주를 찾아주기로 하고서 돈을 받고 잠적했던 첫 번째,
LMIA를 받아야 추가점수를 받는다고 해 오픈 비자가 있었음에도 비자를 다시 받게 한 두 번째,
영주권을 맡겼더니 낮부터 술만 마시고 일을 안 하는 세 번째.
세 번에 걸쳐 일어났던 일이라 이주공사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이민 일 역시 생각해보지 않았다. 제안을 받고 고민하다 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라이선스를 갖고 일을 하는 전문직이라는 거다. 다시 공부를 하고 자격시험을 봐야 한다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나에게 맞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투자는 필요할 것이다.
사무실이 로히드에 있어 거리가 멀지 않은 것도 괜찮았다. 내가 만난 이주공사 사람들이 다는 아닐 수 있으니 직업탐방 차원에서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면접 일정을 잡고 보니 사무실이 다운타운이었다. 그새 이전을 했다고 한다. 로히드와 다운타운은 큰 차이다. 소개를 받고약속을 해 둔터라말을 바꾸기가 난감해일단 면접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간 데다 다운타운에서 운전은 처음이었다. 몇 년을 걸어 다니며 헤집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일방통행로가 엄청 많다는 걸 운전하며 제대로인지했다. 랍슨과 버라드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길이 일방로였다. 목적지에 다 오고 나서도일방통행에 걸려 진입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다 역주행을 하는 아찔한 순간이 왔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버스와 차들을 보자 당황해 식은땀이 났다. 역주행하는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서서 공간을 만들어준 운전자 덕분에 다행히 큰 일을 당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주차할 곳을 찾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일을 하더라도 차를 갖고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
사무실은 워터프런트역(Waterfront Station)에서 몇 분 안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네 잠시만요~ 어? 언니~~"
이주공사 사무실에 만난 '일하는 게 영 시원찮은 아'는 뜻밖에도 컬리지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나보다 몇 살 아래의 동생이었다.
"어머? 어떻게 여기서 만나?"
"그러게 말이야~ 오늘 면접 보기로 한 게 언니야?"
"응. 여기선 언제부터 일했어?"
"음.. 한 8개월? LMIA 비자 얼마 전에 들어갔어."
"아이고, 갈 길이 멀구나..."
짧은 인사를 나누고 대표와 미팅룸에서 면접을 했다. 피부관리실 언니를 통해 얘기를 전해 들은 대표는 만나기도 전부터 나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력서를 보며 얘기를 하다 보니 대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나 블리야씨랑 일해보고 싶은데 어때요?"
"제가 이제 연방에 서류가 들어가서 랜딩 때까지는 가게 일을 해야 해요."
"으으응~ 알지 알지~ 파트타임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때요?"
"그럼.. 제가 화요일과 목요일 쉬는데 어떠신가요? 이틀 모두 저녁에 수업이 있어서 늦게까지 있지는 못할 것 같아요."
"으응~ 그럼요,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난 일주일에 두 번 레스토랑을 쉬는 날, 다운타운으로 출퇴근을 하며 이민 일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지막 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코퀴틀람으로 돌아와 바로 학교를 가야 하는 숨 가쁜 일정이었다. 덕분에 단 하루의 쉬는 날도 없이 일주일을 보내야 했지만 내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이었다.
파운데이션(Foundation) 레벨 5에서 시작한 나의 영어 공부는 어느덧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레벨로 올라갔다. 저녁 수업으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단계가 커뮤니케이션이다. 다소 지루했던 파운데이션 과정을 마치고 시작한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레벨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문법은 다루지만 긴 글을 읽고 써야 하는 에세이가 많았다. 영어를 쓰면서도 내가 맞는 영어를 구사하는지는 늘 의구심이 있었다. 내가 쓰는 글에 대해서도 확신이없었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쓰거나 과제로 작성해 간 에세이를 보며 교정을 해 주셨다. 글을 풀어나가는 전개에 있어서는 늘 좋은 점수를 받았다. 대부분 실수는 관사와 전치사였다. 개인 발표와 그룹 발표가 있어서 스피킹 훈련 기회도 많았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담당했던 리사 선생님은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실제 선생님이었다. 말이 속사포처럼 빠르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빵빵 터지지만 정작 본인은 웃지 않는다. 남동생 와이프가 한국인이라며 불쑥 나타나 가족모임에서 있었던 일화나 한국 문화에 관해 본인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툭 던져두고 가기도 한다.
파운데이션 과정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 에링은 커뮤니케이션까지 계속 수업을 같이 들었다. 수업 중에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에링은 뉴스킨(Nuskin) 일을 하고 있었다.
영주권 준비를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웬일인지 에링은 내가 연방의 최종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던 시점에도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워킹 비자로 사무직 일을 하며 뉴스킨 수입만 연간 10만 불에 달했던 에링은 경치가 좋은 코퀴틀람 언덕에 이미 집이 있었다. 처음 캐나다에 올 때 중학생이던 딸은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있었고 대학 진학 전 영주권이 절실했다. 외국인의 대학 등록금은 3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물론 수입이 좋았기 때문에 등록금이 큰 걱정은 아니었지만 체류, 즉 비자는 외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매번 에링이 영주권 진행 상황에 대해 하던 이야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브런치를 하자며 연락을 해 왔다. 내가 혼자 영주권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과 이민 일을 시작한 걸 알고 있던 에링은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가 이주공사에 당한 일들은애교에 불과했다. 에링은 이민 사기를 제대로 당했다. 캐나다에 먼저 와 있던 친구를 통해 이주공사를 소개받고 비자업무를 맡겼다. 비자가 준비됐다는 소식에모든 걸 정리하고캐나다 공항에 도착한 에링과 딸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비자가 나오지 않았던 거다.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에 들어왔지만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던 그 이주공사의 일 처리는 수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이주공사에 갖다 바친 돈이 10만 불이 넘는다고 한다.
"네 말은, 만불이라는 거지?"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친구는 1억이 넘는 돈을 이란 사람이 하는 이주공사에 그것도 모두 현찰로 갖다 바쳤다. 중요한내용을 모두 직접 만나 얘기하거나 전화 통화로 진행했고 그 흔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 한통 주고받은 게 없었다.
"서류는 어떻게 보내줬어?"
맙소사였다. 심지어 서류까지 모두 직접 배달을 했다고 한다. 이민 사기를 입증할 문자도 이메일도 없고 은행 계좌에도 그 사람에게 돈이 넘어간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며 온갖 핑계로 둘러대는 이주공사와, 다행히도 스스로 고용주를 찾아 비자를 받아 가며 체류를 연장해 오던 에링은 나에게 믿을만한 이민 컨설턴트를 소개해 달라고 한다.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세 곳으로부터 모두 당했던 터라 참 난감했다. 불과 얼마 전 일을 시작한 곳을선뜻 소개해주기도 부담스러웠다. 이주공사는 절박한 이민자들을 호구로밖에 보지 않는 건가? 주변에 속 한번 안 끓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이주공사 피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