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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May 12. 2024

신뢰가 동아줄을 내려줄 때

09. 디자인코리아 국제회의

"전화 바꿨습니다. 블리얍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고구려대왕의 박부장입니다."


짧은 순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스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저희 회사가 이번 디자인코리아 총괄대행을 맡고 있는데요. 진팀장님이 블리야팀장님을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당장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없어 막막했던 내게 한줄기 빛과 같은 전화였다. 급하게 회사소개서와 명함을 챙겨 외근 준비를 했다. 미팅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몰라 회사에 대한 보고는 미룬 채 서둘러 사무실을 나선다.


디자인진흥원은 첫 회사에 입사하던 해 행사를 하며 알게 됐고, 갑작스레 회사에서 잘린 후 긴급히 합류 요청을 받아 몇 달간 세계베스트디자인전을 같이 했던 곳이다. 지하철을 타고 한때 매일 출퇴근을 하던 이곳에 1년 반 만에 다시 왔다. 야탑역에 내려 진흥원을 향해 걸으며 지난 두 번의 인연이 어쩌면 나에게 동아줄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 본다.


로비에 들어서니 카페에 앉아있다 일어나는 두 명의 남자가 보인다. 전화한 회사 직원들임을 알아볼 수 있다.


"블리야 팀장님? 급하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드렸던 고구려대왕 박부장입니다."


명함만 교환한 채 그대로 2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잠시 앉아있자니 진팀장과 처음 보는 제법 직급이 있어 보이는 여직원,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몇몇 직원들이 회의실로 들어온다.


"안녕하셨어요 팀장님!"

"어~ 왔어? 이제 팀장이야?"

"네, 팀장 됐습니다."

"초고속 승진이네? 축하해~ 명함 하나 줘봐."


명함을 빼들어 회사소개서와 함께 진팀장에게 전달한다. 나머지 직원들에게도 명함을 전달하며 인사를 나눈다.


"블리야 팀장님 아시다시피, 저번 세계베스트디자인전이 대박 났잖아요. 그때는 첫 행사여서 기대가 없이 시작했는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단 말이지. 올해는 기대치가 있어서 더 잘해야 되는데.. 내가 저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총괄대행사라고 선정해 놨더니 하는 일이 개판이야."


여전히 걸걸한 입담을 날리며 오늘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한다. 험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 덕분에 진팀장의 스타일을 모르면 깨지는 게 일이다.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진팀장이 손대는 프로젝트는 실패가 없다. 배가 산으로 가도 기어코 만들어내는 성공 제조기다.


"여기 우팀장이 국제회의 담당이야. 둘이 국제회의는 알아서 해. 저 놈들 끌고 가려면.. 아이고... 내가 한숨이 난다 한숨이.. 이거라도 떼줘야 나머지 일이라도 똑바로 하지. 행사 잘하지? 열심히 해봐!"


진팀장은 국제회의를 나에게 맡기며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냈고 나는 팀장이 되어 프로젝트 수주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라 숨통이 트였다. 첫 미팅이 그렇게 끝나고 우팀장과 우팀장 팀원, 총괄대행사가 따로 회의를 했다. 내가 진흥원에서 일할 당시 영국 연수 중이라고 말로만 듣던 우팀장을 오늘에서야 처음 만났다. 한마디 한마디에서 똑똑함이 뚝뚝 떨어지고 말이 명료한 게 제법 깐깐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진행 과정을 전해 듣는데 사실 진행된 게 없다. 기본계획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 국제회의에 배정된 예산이 있었지만 우리 쪽 계획안에 따라 다시 예산을 작성해 총괄대행사와 계약사항을 협의하기로 했다.




아.... 아무리 봐도 아니다. 콘셉트 설명을 수차례 하고 몇 번의 재작업 요청에도 디자인이 나오지 않는다. 명색에 '디자인 국제회의'인데 이 시안들을 디자인이라고 올릴 수가 없다. 난 디자인 전공은 아니지만 몇 년간 컨벤션업계에서 구르며 수많은 디자인을 봐왔던 터라 적어도 어떤 게 좋은 디자인인지는 알 수 있다.


며칠 후 있을 전체회의에서 디자인 시안을 보고하기로 했지만 내 눈에도 차지 않는 걸 올렸다가 진팀장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할 일이다. 절실할 때 동아줄을 내려준 나를 신뢰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은 원하는 걸 보여주는 거다.


급히 한 곳에 전화를 해 미팅 약속을 잡는다. 미팅 약속이라기보다는 기습 방문이다. 전 회사에 눈먼 돈을 벌어다 줬던 세 번의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디자이너다.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디자인 철학이 있고 결과물이 정갈하다. 


문제는 예산이다. 예산 때문에 마지막까지 한가닥 가능성을 붙잡고 회사가 거래하는 디자인사의 결과물을 기다렸지만 결론은 이 프로젝트는 그곳과 함께 갈 수 없다였다. 이미 확정된 국제회의 예산이 있어서 퀄리티를 높여보려 해도 예산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총괄대행사가 이미 잡아놓은 빠듯한 예산으로 이 디자인사와 간다면 손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손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신규 거래처를 쓰는 이유를 회사에 설득시켜야 하고 새 디자인 파트너와는 가격 협상을 해야 한다. 그래도 결과물에 대한 의심은 없으니 한 가지 짐은 덜고 시작하는 거다.


난 이 디자인회사 사무실이 참 좋았다. 서초동 주택가 부유해 보이는 이층 주택들 사이에 있는 정원이 딸린 집이다. 정원에 심어진 키 작은 나무들도 좋고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꽃밭과 장식들이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직장인에게는 참신하게 느껴졌다. 이층 주택을 개조한 사무실 자체가 '우린 달라요'하며 어필하는 듯하다. 


짧은 미팅에도 역시나 '아' 하니 '어' 하고 돌아온다. 전체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시안을 받고 곧바로 회의에서 보고해야 하는 위험이 있지만 그만큼 결과물에 대한 나의 믿음이 있다. 화려한 오방색에 금방이라도 통통 튀어나갈 것 같은 행사 블럼 파일을 전달하고 3개의 콘셉트 시안을 받기로 했다.


디자인코리아 2005 엠블럼




디자인코리아 전체 미팅. 고구려대왕이 진행상황과 안건들에 대한 보고를 하지만 진팀장 스타일을 아는 나는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다. 진행경과가 지난번 회의때와 크게 다르지 않고 계획을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걸 보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는 찰나, 역시 진팀장의 심기가 불편하다. 다른 때와 다르게 톤을 축 내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존대를 써가며 말한다. 이것은 평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걸걸하게 말하는 진팀장이 참을 만큼 참다 도저히 못 참을 때 나오는 진팀장만의 화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고구려대왕, 그쪽 정체가 뭐예요? 박부장님! 입찰할 때 얘기한 행사 경력 사실입니까? 이 행사 어떻게 수주하셨어요? 계약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삽질을 하고 계세요! 나한테 무슨 원수 졌습니까? 이 행사 말아먹으러 왔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팀장이 터벅터벅 회의실을 걸어 나간다. 회의가 중단됐다. 회의가 다른 분위기로 진행되자 고구려대왕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직 진팀장을 파악하지 못한 거다. 진팀장이 기운 빠진 저음으로 말을 하고 나가자 심각한 분위기가 더욱 강하게 회의실을 지배한다.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진팀장이다. 잠시 후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진팀장이 회의를 재개한다.


"고구려대왕, 홍보 시안 수정한 거 보여주세요."

"회의자료 13페이지에 있습니다."


고구려대왕이 안건 사이에 들어가 있는 홍보 시안 페이지를 읊어주고 페이지를 넘겨 확인한 진팀장은 아무 말 없이 시안을 응시한다. 진팀장의 반응을 살피느라 고구려대왕팀은 숨조차 쉬지 못하는 듯하다.


"국제회의! 디자인 시안 왔어요?"


우리 직원이 보드에 준비해 온 시안 여러 개를 진팀장 책상 앞에 진열해 놓는다. 의자에 한껏 기대어 무표정하게 책상 위에 놓인 시안을 멀찍이 들여다보던 진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쉰 후 자세를 바로 잡고 말을 이어간다.


"고구려대왕"

"네!"

"나랑 일 몇달 했죠?"

"..."

"지금 석 달, 넉 달 지났죠? 합류한 지 한 달도 안 된 국제회의팀에서 만들어온 시안 보여요? 이런 게 디자인이에요 이런 게!"

"....."

"전시파트로 나가는 거 제외하고 전체 홍보 디자인 잡힌 거 국제회의팀에 다 넘기세요."


우리가 맡은 건 '국제회의' 뿐이지만 '디자인코리아' 전체 행사의 홍보 디자인물이 우리에게 넘어왔다. 그 말은 우리 예산이 커진다는 거다. 이로써 나는 회사에 업체를 바꾼 이유를 설명할 명분이 생겼고 디자인사에는 더 많은 물량을 줄 수 있으니 금액 협상도 수월해진다는 말이다. 우팀장이 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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