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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May 19. 2024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빠른 인정

10. 신의 한 수가 된 실수

국제회의 프로그램의 방향이 잡힌 후 초청 연사 명단이 확정됐다. 진흥원으로부터 연사별로 간단히 정리된 약력과 강연료가 책정되어 나왔다. 연사 후보들 중엔 진흥원에서 특별히 공을 들이고 있는 당시 영국의 핫한 산업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Jasper Morrison 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온 우팀장의 영향이 지배했으리라는 추측이 든다. 연락처를 확보하고 초청을 추진하는 건 우리의 일이다.


연락 채널을 확보하는 동안 연사별로 초청 레터를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초청 레터는 연사에게 '첫인상'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당신의 업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행사에 와서 당신의 가치를 공유해 주십시오'라는 메시지 간결하고 힘 있게 전달해야 한다. 그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 연사에 대한 배경조사를 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파악한다.


또한 초청하고자 하는 행사에 대한 취지와 성과, 참석으로 인한 기대효과를 임팩트 있게 어필해야 한다. 초청에 응할 시 행사에서 하게 될 역할을 제시하는 것도 포함된다. 각 연사별 초청 레터와 간결하게 정리된 별첨의 행사 소개자료가 나왔다. 최종 검토를 마친 자료들은 이제 연사들의 손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연사 초청 업무를 담당하는 윤성이는 행사 경험이 전혀 없는 신입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몇 번의 행사를 하면서 내가 신뢰하고 있는 직원이다. 행사 경력은 길지 않지만 지구력이 있고 언어 센스가 있어서 내가 방향을 잡아주면 그걸 그대로 영문으로 만들어낸다. 영어가 뛰어나지 않은 내가 초안을 보며 외교적 결례나 논쟁이 될 만한 단어들을 짚어주고 뉘앙스를 설명해 주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수정을 해 온다.


하나 둘 초청에 수락하는 연사들의 회신이 온다. 가장 고대하던 천재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회신이 늦어져 초조해하던 어느 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결과는 'YES'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진흥원도 재스퍼 모리슨의 초청 수락 소식에 반색이 되었다. 확정된 연사들로 홍보에 불을 지피고 참가자 유치에 집중해 현장을 풍성하게 할 일만 남은 듯했다.


재스퍼 모리슨 (출처 designboom.com)




"팀장님..."


윤성이가 얼굴에 잔뜩 겁을 담고 새빨개진 얼굴로 내 자리로 왔다. 표정을 보니 불길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윤성이를 데리고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잠깐 침묵이 흐르는 동안 긴장이 나를 엄습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다.


"윤성아, 괜찮아 얘기해 봐"

"팀장님... 제가 실수를 했어요.."

"무슨 실수?"

"재스퍼 모리슨.. 레터에.. 강연료를 잘못 넣었어요.."


국제 디자인상에서 수상을 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는 있었지만 '신예'에 가까웠던 재스퍼 모리슨에게 책정된 강연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검토가 끝난 레터에 금액만 넣어서 보내면 됐던 일이라 최종으로 나간 자료는 내가 확인을 하지 않았다. 윤성이가 레터에 넣은 강연료는 다른 연사의 금액이었고 자릿수가 달랐다.


"어떻게 해요.. 팀장님..."

"나 진흥원 갔다 올게. 하던 일 계속하고 있어."


서둘러 가방을 챙긴 나는 회사를 나섰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대형사고다. 시간을 벌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의 행사 경험으로 나는 '만회할 수 있는 실수''만회할 수 없는 실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터득했다.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암흙속에 묻어두는 건 언젠가는 드러날 종양을 방치해 암덩어리로 키우는 일이다. 드러났을 땐 이미 전체를 장악하는 힘을 발휘한다. 종국엔 손을 쓸 수 없게 되고 결국 행사를 망치게 된다. 돌이킬 없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실수를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시간을 아껴서 회복할 수 있는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


진흥원에 도착해 우팀장의 사무실이 있는 2층, 건물 끝자락 통유리가 길게 있는 복도를 따라 놓인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진흥원에서 몇 달간 일하며 건물을 제법 파악하고 있는 나는 이곳이 직원들 통행이 많지 않은 곳임을 알고 있다. 얄궂게도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네, 진흥원입니다."

"팀장님, 저 블리얍니다."

"네 팀장님!"

"저 지금 2층에 와 있는데 잠깐 뵀으면 합니다."

"여기.... 오셨다고요?"


우팀장의 목소리에서 갑작스레 회사로 찾아온 내가 시한폭탄을 품고 있음을 직감한 듯 불안이 느껴진다. 얼굴에 잔뜩 긴장이 배인 우팀장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심스레 옆에 앉은 우팀장은 상황설명을 하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팀장님 우선 저는,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아요. 사과를 하고 실제 강연료를 얘기해야 하겠지만,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 대체할 연사도.."

"팀장님 혹시, 재스퍼 모리슨에게 협업을 제안할 방안이 있을까요?"

"협업이요?"


순간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우팀장 눈이 반짝인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돌파구를 찾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떠올린 아이디어다. 수많은 기업체의 디자인팀과 연결되어 있는 진흥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네. 현재 책정된 강연료로 수락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일단 그 기간 일정은 가능하다는 얘기고, 신예 디자이너니까 우리가 기업과 협업 제안을 하면 수락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하지만 초조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진흥원에서 어떤 칼을 빼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거다. 기가 죽은 윤성이는 구석자리에 콕 박혀 고개를 떨구고 일을 하고 있다. 얼마나 울었는지 새빨개진 눈에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쌍꺼풀을 지워냈다.


"윤성아, 우리 오늘은 이만 접고 나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


윤성이를 데리고 회사 근처 치킨집으로 갔다. 분위기가 좋은 곳은 아니지만 난 이 집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치킨이 맛있는 음식이란 걸 알았다. (지금까지도 태어나서 먹은 가장 맛있는 치킨으로 남아있.) 난 치킨 마니아도 아니고 튀긴 음식을 즐기지도 않는데 이 집 치킨은 튀김옷 안에 육즙이 그대로 담겨 있어 퍽퍽함이 없이 부드럽고 맛있음을 느끼며 먹게 된다. 한참 취기가 올랐을 때 시켜 먹는 김치찌개도 할 말을 잃게 한다.


맥주는 역시 첫 잔이지~ 냉동실에 넣어두어 살짝 살얼음이 낀 맥주잔에 담긴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 삼키며 캬~~ 좋다~ 잊을 수 없는 오늘이 되겠구나..


"팀장님... 왜.. 저 안 혼내세요."

"궁금해?"

"네...."

"윤성아. 지금 가장 마음이 괴로운 건 윤성이 너지. 스스로 혼내고 있잖아. 혼내서 바뀔 수 있는 일이었으면 혼냈을 거야."

"팀장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직 덜 울었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윤성이를 보니 앞으로 더 단단해질 것 같은 기대가 든다.


"실수는 누구나 해. 하지만 실수가 반복되면 그건 너의 실력이 되는 거야. 오늘의 눈물을 기억해."

"네 팀장님. 잘할게요!"

"앞으로 우팀장이 이메일 나가는 것까지 다 검토받고 CC 하라고 한다. 우리가 실수했으니 그건 감당해야지 뭐. 그렇지?"

"네.."


우팀장이 처방약으로 내려준 건 삼성전자와의 디자인 협업이었다. 삼성 측 디자인전략실과 며칠 만에 협의를 이뤄낸 재스퍼 모리슨과의 디자인 협업은 신예에게 강연료 얼마보다 더 가치 있는 제안이었다. 우리 측 실수에 대한 사과와 협업 제안을 받아들인 재스퍼 모리슨은 그해 12월 디자인코리아 국제회의에서 가장 핫한 연사가 되었다. 유료 행사였던 참가자 등록은 일찌감치 조기 마감이 되었고 재스퍼 모리슨 세션에 가장 많은 참가 신청이 몰렸다.


재스퍼 모리슨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문에 트레이가 달린 삼성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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