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국 블리야 Jun 02. 2024

버릇없는 계획안을 승인한 청와대

12. 도플갱어를 만나다

세계신문협회총회를 목전에 두고 있던 회사가 포기한 건 APEC 행사뿐만이 아니었다. 연례행사로 열린 벤처기업 시상식도 포기해야 했다. 종이따귀를 날린 부회장은 협회를 떠났지만 회사는 입찰 준비를 할 여력이 없었다. 나와 호흡이 좋았던 사업팀장은 원래 하고 싶어 했던 회사와 일을 하게 됐지만 한 번씩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다음 입찰에 꼭 들어와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해 마케팅 계획을 세우면서 벤처기업 시상식은 수주해야 할 프로젝트 1순위였다. 목표대로 우린 행사를 수주했다. 이제 실행 책임이 아닌 행사 총괄자로 시상식을 준비하게 됐다.


그해 포항공대 개교 20주년을 맞아 세계대학총장포럼 준비 중이었다. 다른 클라이언트의 소개로 나에게 연락을 해 온 포항공대 측 행사 담당자는 목소리가 상냥한 여자분이었다. 포항은 연고 하나 없는 곳이지만 포항 출신 직원과 같이 일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친근함이 느껴졌다. 행사계획과 예산등을 이메일과 유선으로 협의한 후 계약을 위해 포항에 내려갔다.


생전 처음 방문한 포항공대의 캠퍼스를 가로질러 약속장소인 건물을 찾아가는 길, 먼발치에 원색의 정장을 갖춘 여자분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에게 걸어온다. 전화 통화를 해 온 행사 담당자인 듯하다. 반가움에 밝은 표정으로 다가가는데 점점 간격이 좁혀지면서 내 얼굴은 조금씩 굳어져간다.


'이. 럴. 수. 가... 이건.. 말로만 듣던 도. 플. 갱. 어...?'


얼굴이 또렷이 보이자 내 얼굴엔 웃음기가 거의 사라졌다. 얼굴의 정면, 왼쪽, 오른쪽을 살펴보는데 나랑 너무 닮았다. 내 언니와 내가 붕어빵처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언니를 볼 때의 그 느낌이 아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직원의 얼굴에도 어색한 미소가 흐른다. 서둘러 입꼬리를 올린 채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사무실로 이동을 한다.


'잠깐, 도플갱어를 만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사무실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도플갱어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계약을 마친 후 행사에 투입된 여러 직원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당장 시작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 미팅 후 다른 직원들이 자리를 뜨자 담당자가 먼저 말을 꺼낸다.


"팀장님~ 저랑 많이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저도 그래요.."

"팀장님도 그랬나~요? 우리 정말 많이 닮았습니다.."


한바탕 크게 웃는 동안 우린 조용히 품고 있던 서로를 향한 의심을 던져버렸다.

 



어느덧 포항공대 개교 20주년 행사가 열리는 9월이 왔다. 포럼은 4일간 포항공대에서 열리지만 해외 대학 총장들과 수행단의 출입국 의전을 위해 우린 일주일간 주 현대호텔에서 숙박을 하게 됐. 사전준비가 잘 됐고 복잡한 행사가 아니어서 중요한 그날 일정이 마무리되면 다음 일정을 위해 준비할 사항들을 직원들에게 짚어준  오후 4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벤처기업 시상식 업무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KTX를 타고 경주로 내려가는 강행군이 일주일간 이어졌다.


포항에 내려가고 며칠이 지나 벤처협회 사업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블리야 팀장님! VIP께서 시상식에 임석하시겠답니다."


협회가 오랫동안 숙원하던 일이다. 취임 초기부터 벤처와 IT 산업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해 오고 창업을 적극 독려해 오신 노무현 대통령을 시상식에 모시고 싶어 했던 협회의 바람을 알기 때문에 반가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날짜가 안 맞습니다."

"날짜가 안 맞는다구요?"

"네. 임석은 하시는데, 우리가 계획한 날엔 일정이 안되신답니다. 19일로 날짜가 왔는데 어쩌죠?"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인다. 날짜가 바뀌어 참석자들에게 일정을 재공지하고 협력사와 설치 일정을 조율하는 건 큰일이 아니다. 문제는 행사장이다. 날짜가 바뀌면 당장 행사장부터 섭외해야 하는데, 10월은 컨벤션업계에서 가장 바쁜 성수기다. 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행사장, 대통령 행사에 적합한 시설과 현장 인력을 갖춘 검증된 장소, 행사장 설치와 안전 점검을 위해 필요한 행사 전 2일을 포함하면 3일간 비어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청와대와 협의가 잘되어 설치와 안전 점검 일정을 단축한다 하더라도 2일은 가능한 장소여야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팀장님, 우선 행사장부터 알아볼게요. 연락드릴게요."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코엑스였다. 매년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진행되는 행사였던 터라 협회는 장소 예약을 항상 미리 해두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만실이다. 전시장조차 가능한 곳이 없다. 이어 서울, 서울과 인접한 다른 컨벤션센터에 연락을 하지만 장소가 없다. 서울에 있는 특급호텔 역시 가능한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급을 낮춰본다. 급을 낮추면 행사 담당자에게는 리스크가 커진다. 점검해야 할 게 더 많아지고 기본 시설로 보완이 안 되는 것들은 예산을 들여 보강을 해야 한다. 다행히 가능한 몇 곳이 나왔다. 그날 저녁 일정이 가능한 곳과 약속을 잡아둔 나는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답사가 잡힌 호텔로 향했다. 사업팀장과 만나 장소를 둘러보는데 천고가 너무 낮아 큰 무대를 놓을 수가 없다. 실망감을 안고 사무실에 들러 시상식에 투입된 직원들과 긴급회의를 하고 경주로 내려갔다.


다음날도 서울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나는 김포공항에 도착해 리무진을 탔다. 피곤이 몰려와 리무진에서 깜빡 잠이 든 나는 공항터미널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에 후다닥 잠에서 깼다. 퇴근시간이 겹친 삼성역 인터컨티넨탈호텔 앞은 혼잡했다. 꽉 들어찬 차들로 우측 진입로가 막혀 도착시간이 지연되자 기사 아저씨는 호텔 앞 3차선에서 차량 문을 열어준다.


"여기서 내리실 분은 내리세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했던 나는 가방을 들고 리무진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른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순간 모든 게 멈춘 듯하다.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 chuttersnap, 출처 Unsplash


"아가씨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의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고 두 다리는 버스 밑에 나란히 들어가 있다. 3차선에 멈춘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던 나는 구두굽이 계단에 걸려 그대로 몸을 날렸고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땅을 디뎠지만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4차선에 들어오는 차가 있었더라면 즉사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다른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4차선을 막아주고 있었다. 잠시 후 느껴지기 시작한 고통이 너무 커 창피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너무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도움을 받고 일어났지만 두 팔과 다리에 전해진 충격으로 쉽사리 걸을 수가 없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은데 생전 처음 느끼는 종류의 고통이다. 참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팔과 다리는 내 것이 아닌 듯하다. 택시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양팔과 다리는 온통 까여 피가 흐르고 손목부터 벌겋게 퉁퉁 부어올라있다. 통증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신음하고 있자 직원이 급히 약국에서 비상약들을 사다 준다.


부상으로 몸이 아픈 와중에도 며칠간 저녁마다 행사장을 둘러보지만 적합한 찾을 수가 없다. 기둥이 많아 시야가 가리는 곳, VIP 동선이 나오지 않아 경호 문제가 있는 곳, 시설이 너무 낙후한 곳, 천고가 낮아 연출이 불가능한 곳들만 남아있었다.


실망이 절망이 되고 절망이 절실함이 된 나는 코엑스 예약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해 예약현황을 요청해 보지만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KTX를 타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 절실함에 몇 년간 행사를 하며 친분이 돈독한 코엑스 현장 담당 차장에게 전화를 다. 늦은 시간이지만 다음날 행사장 세팅 때문에 야근을 하고 있던 그분께 10월 코엑스 행사장 전체 예약리스트를 부탁했다.


경주 숙소에 도착한 건 새벽 2시. 도착하자마자 이메일로 받은 예약리스트를 펼쳐두고 표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하루라도 가능한 날이 나오면 밀어붙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코엑스의 수많은 회의실, 전시장의 예약상황을 일별로 정리를 하다 보니 19일 딱 하루 비는 전시장이 나왔다. 하지만 전날까지 잡힌 행사가 있다. 제발..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침이 되자마자 코엑스에 전화를 해 철거일정을 확인해 본다. 자정쯤 철거가 마무리될 거라 한다. 기대했던 답변은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의전의 문턱을 대폭 낮춘 청와대였지만 이건 도전이었다. 청와대에서 최대한 협조를 해준다 하더라도 자정부터 행사장 안전점검을 하고, 설치를 마친 후 2차 안전점검, 리허설까지 한다는 건 하나의 모험이었고 죽음의 일정이었다. 전시장이면 바닥공사부터 의자 세팅, 무대 설치까지 해야 할 일이 오디토리움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하지만 다행히도 코엑스다. VIP 행사 능력은 검증되고도 남은 데다 계약부서, 현장팀과의 관계가 좋으니 코엑스 측의 협조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팀장님 블리얍니다. 코엑스 인도양홀 한 칸이 나오는데 19일 단 하루만 가능해요. 직전 행사는 밤 12시에 철거가 마무리된다고 해요."

"아... 무리 같은데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청와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행사장 봉인은 불가능하고, 철거와 안전점검, 설치를 동시에 들어가야 해요.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야 합니다."

"설치 일정은 가능할까요? 리허설은요?"

"코엑스와 저희 협력사 일정은 제가 풀겠습니다. 직전 행사 주최기관과도 철거일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지 협의해 볼게요. 우선 청와대에 구두보고를 해주시고 설치계획안이 나오는 대로 보내드릴게요."


코엑스를 통해 직전 행사 담당자와 연결이 된 나는 가장 설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무대가 놓일 공간을 우선적으로 철거해 주는 안을 협의했다. 원래 행사장이 완전히 빈 상태에서 봉인 후 이뤄지는 안전점검은 철거가 되는 곳부터 부분적으로 진행하고 행사장에 들어갈 장비 점검도 반입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안을 만들었다. VIP 행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계획안이었다. 하지만 계획안대로 된다면 4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다.


협회를 통해 계획안이 올라간 후 청와대로부터 전화가 왔다.


"블리야 팀장님? 승진하셨어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사고 한번 칠 줄 알았다고요 내가. 청와대를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닙니까?"

"VIP를 모시고 싶어 하는 제 클라이언트와, 벤처산업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시는 VIP의 의중을 아는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무조건 만들어내야죠."

"하하하 배짱이 끝내줍니다. 잘 만들어 봅시다! 며칠 내로 미팅 잡을 테니 준비 잘~ 해서 들어오세요."


VIP 행사의 관례를 깨고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이례적이고 버릇없는 계획안을 받은 청와대는 이를 승인했다.

이전 11화 보이는 것의 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