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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May 26. 2024

보이는 것의 힘

11. 어린 여자 팀장은 머리를 잘랐다

경력 3년 10개월 만에 팀장이 된 나에게는 덤으로 따라온 스트레스가 하나 있었다. 그건 나의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중간 키에 마른 체격, 줄곧 해온 긴 생머리의 나를 첫눈에 팀장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외모나 성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컨벤션기획사로서 나를 봐주고 프로젝트를 이끄는 팀장으로서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난 그저 어린 여자였다. 을이라는 내려보기 좋은 위치에 있는 더구나 어린 여자. 외모나 성별을 앞세워 나를 흔드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 실력을 알게 되면 괜찮아지겠지'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스스로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진정성의 힘'을 믿었다. 나의 진정성은 그들이 가려운 곳을 찾아내어 긁어주고 행사 성공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며 증명이 되었다. 실패는 없었다. 다른 거래처를 소개해주고 다음 행사를 부탁해 오는 클라이언트들이 증거였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나 보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했다. 생전 처음 한 파마머리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렸고 사촌동생들 머리를 예쁘게 땋아주며 늘 인기가 많았던 내 손은 정작 내 머리를 위해서는 실력발휘가 되지 않았다. 아침마다 파마머리를 손질하는데 한 시간씩 걸렸다.




과학 커뮤니케이션 관련 행사를 할 때다. 국제기관이 있고 국가를 순회하며 열리는 규모가 작지 않은 행사였다. 행사 수주 후 계약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발주처 담당자의 태도에 나는 그저 '어린 여자 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입찰 당시 제출했던 제안서와 예산을 두고 최종 계약을 진행하던 자리에서 담당자는 줄곧 고개를 파묻은 채 의미 없이 페이지만 뒤적뒤적 넘기고 있다. 이미 모든 협의와 검토를 끝내고 계약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회사 도장과 세금계산서를 준비해 왔던 터였다.


제안서와 예산, 계약서를 왔다 갔다 넘겨가며 눈길조차 주지 않던 30대의 담당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한다.


"그 회사는, 높은 사람 없어요?"

"제가 행사 담당 팀장입니다."

"그니까.. 팀장인건 알겠고, 위에 높은 사람, 남자 없냐고"

"회사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왔습니다. 추가 의가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말하면 뭐 해. 그쪽이 결정을 못할 텐데.."

"행사와 관련한 의사결정은 제가 합니다. 제 결정이 회사의 결정입니다."

"됐고! 사장님 없어요 사장님? 사장님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날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꼬깃꼬깃 구겨진 자존심을 눌러 담고 회사로 돌아왔다.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기다리고 있던 경영기획실 실장과 직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향하고 있다.


"계약 못했어요 실장님."

"무슨 일 있었어?"

"잠깐 저 좀 봬요."


웨딩 사업체의 CEO를 겸하고 있던 사장은 일주일에 하루 잠깐 들러 회사 상황을 점검하는 게 다였다. 해외전시 실패로 자금압박이 커지고 직원들 일탈이 이어진 상황에서 프로젝트에 관한 일체의 사항과 직원들 채용을 전적으로 나에게 위임했다. 그사이 컨벤션 1팀 팀장마저 회사를 나가 컨벤션사업부는 다시 1인 팀장 체제가 되었다. 입사 때부터 나를 '복덩이'라 여겼던 사장은 회사가 어려운 와중에 중심을 잡고 사업부를 이끌고 있는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줬다.


밖에서 만든 사장의 개인 수입은 그대로 회사 자금으로 들어왔고 회사는 그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장은 행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살림을 챙기는 건 경영기획실장과 나의 일이었다. 한 번씩 술자리가 벌어지는 날에야 사장은 호스트가 되어 최종 1인이 항복을 할 때까지 성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 참.. 내가 가서 만나볼까?"

"제 생각에 그 담당자는 사장님을 만나서 '갑' 기분을 내고 싶은 것 같아요. 걸리는 것도 없고 다른 이유가 없어요 이미 다 협의가 끝난 것들이라.."

"그래 알겠어. 사장님께 말씀드려 볼게.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 하나?"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제가 얘기하면 부작용만 생길 것 같고, 사장님이 만나서 직접 제안하면 받아들일 것 같아요."

"음.. 그래.."


전에 없던 상황이라 경영기획실장 역시 난감하다. 대부분 클라이언트는 행사 전문가가 아닌 대행사 사장이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걸 불편해하는데 더러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번씩 거한 술자리는 피할 수가 없었다. 행사를 수주하고 나면 치르는 통과의례 같은 술자리다. 잘 봐달라는 인사이자 친해지기 위한 과정이다. 술자리 다음날은 늘 과음으로 뒤탈이 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도움이 되는 측면이 많았다. 적어도 이 업계에서는. 벽을 허물고 한바탕 의식을 치르는 동안 '잘 부탁해', '열심히 해줘', '나 승진 좀 하게 해 줘', '어려운 거 있으면 얘기해'라는 무수한 청탁 아닌 청탁과 약속들이 오간다. 딱딱하게 오가던 대화가 야들야들해지고 대외협조 등 '갑'이 해줘야 하는 지원업무가 수월해진다. '한밤의 의식'을 통해 우리는 한 배를 탔다는 '동지의식'이 생긴다.


그즈음 새로 입사한 경력직 직원이 있었다. 나와 동갑임에도 꼬박꼬박 존대를 쓰며 잘 따르던 그 직원이 어느 날 나에게 말한다.


"팀장님이 옷을 잘 입으셔서 저는 그게 참 좋아요."

"네?"

"예전 제 상사는 실력은 좋았는데 외모에 너무 신경을 안 써서 외부 미팅에 나가면 좀 부끄러웠거든요. 팀장님은 실력도 있고 옷도 예쁘게 잘 입으셔서 같이 나가면 든든해요."


생각지도 못한 류의 대화였지만 직원이 던진 말에서 '보이는 것의 힘'을 생각하게 됐다.



30대 갑의 호출을 받은 사장은 각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명품 양복에 H사의 넥타이, 같은 색깔에 질감이 다른 행커칩, 묵직한 시계를 차고, 기사가 운전하는 반짝반짝 광이 나는 독일산 A사 차량을 타고 등장을 해 주셨다.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모습을 드러낸 사장의 뒤를 거대한 후광이 받쳐준다. 배경음악만 깔렸으면 영화 속 히어로의 등장과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행세를 하려 했던 담당자의 꿈이 산산조각 깨지는 순간이었다. 을로 대하기엔 너무나 고급진 사장의 자태와 후광에 넋을 잃은 담당자는 90도 폴더 인사를 한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과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우, 아닙니다 사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좀처럼 허리를 피지 못하는 담당자가 공손한 손으로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한다. 본인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지난번 태도와 달리 얼굴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과장은 연신 수줍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


"블리야 팀장은 우리 회사의 핵심인력입니다. 제가 특별히 아끼는 직원이에요. 일을 아주 잘합니다. 사업부 일은 전적으로 고 있고 블리야 팀장이 내리는 결정은 곧 저의 결정입니다. 그러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네!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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