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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이야기 Sep 29. 2024

세이지와 손목보호대

우리가 서로를 구하는 방식에 관하여

오늘도 열두 시가 다 되어 일이 끝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지금이라도 운동을 갈까 고민했지만, 오늘은 그냥 목욕만 하기로 했다.

가끔 세이지를 우려낸 물로 목욕을 한다.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말린 세이지 잎과 소금을 넣은 뒤, 뚜껑을 열고 낮은 불로 오래 끓이면 집 안 전체에 향긋한 세이지 향이 퍼지며 깨끗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그 물로 목욕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돈되는 기분이다. 내가 사는 곳은 땅과 돌과 바람의 기운이 무척 세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정화를 해주어야 한다. 음의 기운들은 어디든 생길 수 있고 에너지들은 비슷한 기운들을 서로 끌어모으기 때문에 음의 기운이 뭉쳐서 커지지 않게끔 주기적으로 주위를 정돈해주어야 한다.

요즘 스토리보드 작업이 너무 많아져서 오늘은 친구가 장을 잔뜩 봐 와서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왼쪽으로는 잘 씹지 못하는 나를 위해 푹 익힌 배추찜과 부추와 새우를 넣어 반쎄오를 만들어주었다.
손목 보호대를 찬 내 오른쪽 손목을 보고는 치료해 주고 싶다며 손바닥으로 기를 넣어 주었다.
"나 사실 이런 거 잘 모르지만 그냥 해주고 싶어. 내가 태양이라고 생각하고 손목에 태양을 넣어볼게. 아프지 말아라."

웃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 교복을 입고 만난 그날부터 너는 지금까지 나를 셀 수 없이 많이도 구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너를 도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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