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의 마음의 움직임은 영원히 기억되고 빛난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 일정이 많이 바뀐다. 바뀐 일정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간혹 가다 마음이 불편한 아이들도 보인다. 오늘 한 아이가 새로 다니는 영어학원 수업을 마친 후 미술학원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그 아이는 디저트를 한번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이 종이를 줄게, 한번 OO가 원하는 디저트를 그려볼까?” 싱긋 웃으며 종이를 아이 앞에다가 가져다주었다.
오자마자 그리고 싶은 것이 확고했던 아이는 사라진 채, 텅 빈 종이를 바라보며 갑자기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살짝 투정을 부렸다. 평소에는 방실방실 웃던 친구여서 순간 당황했지만, 아이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곳에서 긴장하다 와서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 담소를 나누며 기다렸다. 곧이어 마음이 풀린 아이는 도넛을 그리겠다고 말하고 오일파스텔을 가지고 와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는 와중에 아이는 “선생님 마음에 안 들어요. 다시 그리고 싶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내가 보기에 충분히 멋진 그림이지만 이미 아이 눈에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드는데 “아니야 괜찮아 예뻐"라는 말이 아이 마음에 와닿을까? 아마 아이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찰 나 눈앞에 코팅기가 들어왔다.
코팅을 하면 더 완성도가 있어 보여서 아이가 좋아할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생님이 코딩해 주면 더 예뻐 보일 거야”라고 말하자 아이게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리고 아이의 그림을 가위로 오려서 코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더 예쁘게 해주고 싶다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코팅기가 과열이 되어 오일파스텔 색이 뒤범벅이 되었다. 아이 눈에도 완전히 망친 작품이 되었다. ‘속상한 아이 마음을 더 속상하게 했네 … 어쩌지’라는 생각과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잠시 당황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두고 “우리 한번 아크릴 물감으로 위에 덮어볼까?” 제안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제안에 승낙을 하고 고동색과 하얀색 물감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밀크 초콜릿색 물감을 만들어 코팅지 위에 살며시 덮었다.
물감으로 덮으며 반신반의하던 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도넛을 보며 환히 웃으며 “선생님 진짜 초콜릿이 묻은 도넛 같아요. 너무 맛있어 보여요!"라고 신나는 목소리로 이야기해 줬다. 나는 속으로 ‘휴’ 한숨을 내쉬고 빙그레 웃으며, “가끔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망친 것 같을 때가 있어. 그럴 때 차분하게 하나씩 고쳐나가면 돼. 그럼 지금보다 더 나은 그림이 될 때도 있어" 마치 인생의 한 법칙을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어떤 기분인지는 표정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꼭 집에 들고 갈 거예요!”라고 말하며 초콜릿 향이 나는 도넛을 두 손 가득 들고 편안한 얼굴로 인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신학기의 부담감과 작품이 녹아내려 속상해하던 아이가 다시 용기를 내서 붓을 들고 그림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불안한 감정들이 서서히 사르르 녹아내리고 다시 웃음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그림은 마음을 움직이는 훌륭한 도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보통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라고 하면 실력과 결과물에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과물은 나중에 하나의 ‘보여주기'로 남을 뿐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얻는 과정에서의 마음의 움직임은 영원히 남고 빛난다. 설령 그 과정이 삐뚤빼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림이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과정 또한 지켜봐 주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