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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선 Aug 18. 2024

5세부터 100세까지

그림이 친구가 될때

오픈 초창기, 아이들을 지도하려고 문을 연 작은 공간 앞에 한 문구를 써두었다: '5세부터 100세까지 환영합니다.' 사실 유머로 쓴 문구였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누구나 쉽게 와서 미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고 성인 수업을 따로 만들 여력이 없었기에 그 문구는 서서히 문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중 작년에 80세가 넘은 어르신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그분은 바로 80평생 그림을 한 번도 배워보지 않으신 나의 아버지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모임이 끊기고, 노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던 아버지가 무료해 보이셔서 그림 그리기를 추천해드렸다.


나이가 있으시기에 그림 그리는 방법이나 스킬을 자세히 알려드리면 오히려 이해하시기 어렵고 부담이 될까 봐, 재료만 드리고 그 사용법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사진들도 찾아 함께 드렸다. 하지만 생소한 재료들로 과연 나이드신 아버지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했다.


첫 그림은 예상대로 많이 미흡했다. 아버지께서도 형태를 잡는 것이 어렵다며, 색감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하시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하지만 용기를 내시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늦은 나이에 어려운 도전을 하셨고, 지금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리신다.


아버지의 늦은 도전과 용기, 그리고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마치 일러스트 작가처럼 능숙하게 그림을 그려내신다. 아버지의 멋진 작품들은 감동적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인상 깊은 것은 매일 그림과 함께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노년에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실 때 몰두하시면서 현재의 고민과 계획들을 잠시 내려놓는 듯하다. 매주 아버지를 뵐 때마다 서너 장의 그림을 들고 오시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삶의 무료함이 사라지고 집중할 것이 생겨서 행복하시다고 종종 말씀하신다. 내가 바라보기에도 흰 도화지 위에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의 내면과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그림이라는 도구가 아버지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진다.


아버지에게 그림이 준 위안을 보며, 나이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미술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새롭게 느끼고 있다. 요즘은 미술이 친구가 되어 매일을 함께 보내시는 아빠의 모습에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더불어, 이 좋은 친구를 아이들에게도 잘 소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잘 그리는 것을 넘어, 미술이 삶에서 위안과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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