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등학교 배정도 끝난 상태에서 보는 시험이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그저 수업없이 빨리 끝나는 시험으로 여겨졌다. 나도 그런 분위기에 휩싸일뻔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기억이 든다.
나는 그 당시에도 시험공부를 열심히 준비했던 아이였다. 그럴만한 이유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해야할 일을 쉽게 놓게 되면 다시 잡기위해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공부가 그렇다.' 라는 말을 부모님께 들으면서 자랐던 경험때문이다.
또 제일 중요한 살면서 1등이라는 성적표 하나는 가져봤으면 하는 목표가 있었다.
결과는 남들이 놀 때 나는 공부를 하며 시험에 응했지만 결국 1등 성적표는 다른 친구에게 양보(?)를 했다.
그래도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성적표를 부모님께 드리니 그날은 저녁에 외식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사서 고생한다.' 이 말의 뜻을 마냥 안 좋게 여기며 살아왔다.
나는 왜 사서 고생할까? 어떻게 해야 살면서 고생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말을 곱씹으며 자책을 했던 적도 많다.
하지만 사서 고생을 한 뒤에 오는 보상이 인생의 사는 맛을 내게 안겨주었다.
부모님의 밑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잠깐 집을 나가 가정을 꾸려봤던 경험에선 모든 게 고생이었다.
주말이 되면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청소기를 돌린 후 집에서 키웠던 여러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집들이를 하고나면 쌓여있는 설거지도 나의 최애인 컬투쇼 모음집을 들으면서 웃으며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던 지인들은 로봇청소기를 사라. 식세기를 사라. 삶이 달라진다. 했지만 나는 그냥 웃어 넘겼다. 물론 위의 가전들을 사고는 싶었지만 집안 일을 하고 나서 오는 뿌듯함과 나만의 즐거움에 머뭇거렸을지도 모른다. 사서 고생했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나는 그 보상을 위해 고생을 했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군대를 다녀온 시점부터 사서 고생한다는 말보단 사서 고생하려고 노력했다.
대학교 때. 집과 정반대에 있는 수도권 대학교를 가느라 2시간씩 통학을 했다.
대학교 신입생이라 가능한 체력과 오기였을까...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1호선에서는 동기들이 항상 먼저 하차했고 인천에 사는 내 동기와 같이 앉아 시험공부를 하며 통학을 했다.
하지만 피곤함에 절어 잠드는 날이 많았고 신기한 건 잠을 자다 깨다를 아무리 반복해도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1호선은 도르마무를 당하는 곳이다.)
항상 일찍 집에 가는 나와 동기를 본 다른 동기들은 항상 우리에게 말했다. 그냥 학교 근처 원룸을 잡거나 고시원에서 살아보는 것 어떻겠냐고. 매번 모임을 하면 제일 먼저 간다고 말하니 동기들이 많이 아쉬워 했던것이다.
그 뒤 군대를 다녀오고나서 복학하기 전 나는 부모님께 통학이 많이 힘들다고 바로 말씀드렸다.
한 학기만 기회를 주시면 기숙사에 들어가 보겠다고 일종의 딜을 했다.
우리 학교 기숙사 배정조건은 다행히 거리순이 아니고 성적순으로 배정되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고시원이라는 곳에 갔다.
부모님도 같이 짐을 날라주겠다는 핑계로 내가 계약한 고시원에 같이 가보셨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와 발목 위로는 옷을 넣을 수 있는 옷장이 있었다.
그 옆으로는 딱 한 명이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사진은 남아있지 않아 비슷한 방의 이미지를 갖고 왔다. 다행이지 않게 나의 방은 창문조차 없었다. 창문방은 2만원이 추가 된다해서 그 2만원조차 아껴보려 했다.
나도 여기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부모님은 더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그렇게 군대를 포함해 두 번째로 집이 아닌 곳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통학하는 2시간이라는 시간이 사라져 버리니 고시원에 같이 사는 동기들과 놀러 다니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고시원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학교와 가까워졌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매일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각 방에서 울리는 알람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하다못해 어느 순서로 어떤 알람이 울릴지도 머리가 기억할 정도였다. 수업이 늦게 시작하는 날은 항상 귀를 막고 잤을 정도다. 특히 자정이 지나면 술 취해 들어오는 사람들로 복도가 시끄러워 잠에서 깬 적도 많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동기들은 나와 고시원을 같이 쓰는 나머지 3명의 동기들에게 말했다.
'그냥 너네끼리 원룸을 얻지 그랬냐 왜 사서 고생해?'
맞다. 또 사서 고생했다.
나와 동기들은 이런 단점들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에는 동기들 모두 기숙사를 목표로 도서관이나 그룹스터디실에 모여 밤을 새우던 날이 많았다. 덕분에 한 학기만에 기숙사에 들어갔다.
만약에 사서 고생하지 않고 공부를 쉬엄쉬엄 하거나 놀러 다녔다면 결과는 불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런 시험기간이 잊혀지지 않고 남는 이유는 이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생활을 해봤다면 느끼겠지만 신기하게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빼고 다 재밌어 진다. 공부를 하다가도 간식을 사자고 하거나 잠깐 바람을 쐬자고하면 모두가 단합한 듯 일어나 나갔다. 또 밤을 새우며 먹는 치킨과 야식은 이 세상 맛이 아닐 정도로 맛있었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마냥 부정만 했다면 결코 이토록 맛있는 음식들과 고생을 함께한 소중한 친구들도 만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서 고생했기에 이런 소소한 추억들조차 현재에도 많이 남은 것 같다. 이런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은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대학 동기들과 후배들을 아직도 연락하며 만나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절반 이상의 대학 동기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고 올해 결혼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친구들도 3명이나 된다. 나도 가정을 꾸린 몇 명 중 하나였는데 이번 사건을 겪으며 다시 혼자가 되어 버렸다. (미혼팀에도 못들어가고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결혼을 하기 전 청첩장모임을 하거나 다른 약속으로 지인들을 만나면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다.
"결혼을 왜 해? 혼자 사는 게 제일 좋아. 아직 늦지 않았어! 왜 사서 고생해?"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이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담처럼 하냐고 진짜냐고 웃으며 재차 물어봤던 그날이 떠오른다.
(좀 더 진지하게 다시 물어봤어야 했나..)
그를 내치고 난 후. 나는 결혼하기 전 어느 한 시점이 유독 떠올랐다.
그와의 진지한 대화에서 그의 가정사를 알게 되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나는 '또 사서 고생하려고 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한편에 그와 그의 가정사에 대한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를 믿고 가자.'라는 생각으로 불안을 떨쳐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의 촉이라는 게 참 무섭다. 나도 느꼈던 걸 내 주변 지인들도 느꼈으니..
사건이 터진 직후 처음에 나는 누군가에게 이번 일을 말하는 게 몹시 두려웠다. 아니. 부끄러웠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내가 싫을 정도였다.
특히 이번 일이 나에겐 흠이 될까 봐 내가 부족해 보일까 봐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안목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걸까?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뒤에는 항상 자책이 따라왔다.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부족한 게 많았나? 신혼 생활동안 내가 못해준게 많았나? 를 매일 생각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점점 작아져 하나의 점이 되기전에 나는 가족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내가 두려움을 깨고 제일 먼저 이 사실을 말한 나의 가족은 내게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작아질 필요도 없어. 심지어 너는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잖아. 너는 최선을 다했어.
이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 나서였을까?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한없이 작아져 있던 나는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내 주위 지인들에게 내가 겪은 경험을 들려줬다.
시작은 나와 정말 가까운 지인들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같은 아파트에 바로 위층에 살던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자 그 친구는 밤 10시에 퇴근하자마자 달려왔다. 그 친구는 통화할 때 났던 내 목소리가 걱정이 됐다며 무작정 차를 끌고 집 앞까지 와줬다. 든든했다. 나는 그 친구와 근처 공원에 가서 새벽 3시가 지나도록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내가 이 상황이 되기 전 과거에 내가 한참 고민상담을 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도 그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 내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와의 관계가 좀 안 맞는 것 같다. 이거 맞는 걸까?라고..
친구는 친구로서 조언을 해줬던 걸로 기억해서 그때 당시에도 많이 고마웠다.
친구는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100번도 넘게 말해줬다.
그 말을 해주는 친구 앞에서 눈물을 참는 게 많이 힘들었다. 안타까웠다. 한 번 터지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눈물을 잠가뒀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같이 힘들어지는게 싫어서 감정을 참았던 것 같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자책하지 말라고. 과거에 대해 자책하지 말고 앞으로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라고.
아마 내 고개가 땅을 쳐다보고 있었어서 친구가 이 말을 해줬던 것 같다.
집에 바래다준 친구는 작별인사로 이렇게 얘기해줬다.
"대현! 말하기 어려운 문제였을텐데 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진짜 넌 대단해!"
자책을 하다 보면 끊임없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자책 속에 자책 속에 자책 속에 자책.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자책 속에 자아는 계속해서 파괴되고 몸속에 어두운 뭔가가 계속해서 커진다.
하지만 자책보단 반성을 하면 블렉홀 같던 이 어둠은 한순간 사라진다.
반성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책보다 훨씬 나은 자아성찰인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를 해준다는 점에서 자책보단 훨씬 나은 이점이 있다.
나는 주변인들에게 들은 여러 조언들에 영향을 받아 현재는 자책보다는 매일 반성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나에게 제시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하루를 시작하면 암막커튼을 걷어 날씨 체크와 동시에 이불을 정리한다. 시작은 항상 중요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