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라고 부르라니? 아깝다. 그 여자를 새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새엄마들에 대한 모독이다. 한동안 잘 되었던 아버지 사업 덕에 우리 가족 동생 나 아버지 그 여자는 그래도 2~3년 간은 풍족히 지냈다. 내가 원하는 학원에도 보내주시고, (물론, 그 시절 여수에는 학원이나 다른 사교육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과외라는 것도 해봤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을 가서 6학년에 또다시 전학을 갔다. 담임 선생님이 육성회비 안 냈다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 여자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싫어서 계속 선생님에게 면박을 당했다. 그러자 학교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새엄마가 일부러 안주는 것이라고. 선생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은 날 또 그 소문이 그 여자에게 들어갔다. 참 신기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 여자는 육성회비 안 낸 것으로 면박을 준 담임과 대판 싸웠고, 소문을 낸 친구의 엄마 역시 찾아가 담기 힘든 쌍욕을 하며 혼내줬다고 자랑을 했다.
'아... 학교를 어떻게 다니나'
IMF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이 여자를 집에서 보기 더 힘들어졌다. 아버지는 서울에 주로 출장을 가 있었다. 중2학년 학원 끝나면 10시 다되어서 집에 들어오면 이 여자는 나가있던지 방에서 문을 닫고 술을 먹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 문을 닫고 공부를 했다. 우리 도시락 만들어 주려고, 달그락 거린 소리도 거슬리냐며 되려 역성이다.
그렇게 IMF 이후 3년? 2년? 정도 더 우리 집에 살았나 보다. 언제부터인지 집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얼마뒤 함께 자기가 샀다고 했던 가구들과 살림을 싣고 떠났다.
같은 집에 있는 동안 고통이었다. 어린 시절 그 여자는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여자였고, 엄마라고 부르라 하면서 중학교 시절 용돈과 케어가 필요한 시절 하루 2천 원씩 따박 따박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거지 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2천 원을 받아 버스티켓 왕복 천 원 천 원 남은 것으로 종고중학교 매점에서 아침에 육개장 사발면을 사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