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괜찮아, 그렇지만 예상치 못했던 변화에 대하여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성장기에 다소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초, 중, 고 내내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훌륭한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탈선하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할머니를 닮아 쾌활하지만 가끔 용처럼 불을 내뿜고 어떤 때는 미친 것처럼 기복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즐겁게 사는 편이다. 주변 사람 챙기는 것을 좋아하고 챙김 당하는 것도 좋아한다. 누구를 만나든 내가 생각한 첫인상이 끝까지 가는 편, 중간은 없기에 한 번 틀어지면 정말 끝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우당탕탕 일대기를 쓰기 전 현재를 먼저 스포 하자면 나는 작년에 결혼을 했고 재밌게 잘 살고 있다. 그러니 나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조금은 슬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니까. 참고로 나의 할매는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시점에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궁금하다면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자.
강원도 홍천은 지금도 시골이지만 30년 전에는 그야말로 깡시골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엄마의 과한 꾸밈에 늘 울상으로 학교에 가야만 했다.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용감한 어린이어야 한다며 태권도 학원을 강제로 보낸 엄마지만, 학교 갈 때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공주로 나를 꾸며버렸다. 공주옷과 양갈래 머리, 선생님 책상에 놓아드릴 엄마가 직접 만든 꽃다발까지. 그 옛날 시골에서 매일같이 공주 복장에 선생님에게 꽃 뇌물을 바치는 나를 친구들은 곱게 바라볼리 없었다. 나 조차도 친구들의 수군거림을 이해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호랑이 같이 무서운 엄마에게 나는 감히 공주 옷이 싫다 말하지 못했고, 엄마가 짜 놓은 빡빡한 스케줄에 따라 강원도 홍천군에서 대치동 어린이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우리 부모님은 이혼했고 나는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다.
당시 나는 부모님의 이혼이 슬프다기보단 '이제 학원 안 다녀도 되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이때를 기점으로 엄마의 가치관이 공부보다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로 바뀌었기에 가끔 엄마를 만나도 숨이 쉬어졌다. 오히려 나는 부모님의 이혼 후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는데 2학년에 진학하며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삶이 흘러갔다. 운동회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어머니회의 엄마들이 학교에 왔는데 "이제 폴순이는 엄마가 없으니까 땡땡이가 잘해줘야 해~"라는 말이 뒤통수에 날아들었다. '엄마와 따로 살 뿐이지 엄마가 없는 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와는 달리 친구들에겐 그럴 수 없는 일이었을까? 그날부로 나는 엄마 없는 애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멀어졌으며, 3학년에 올라가서는 국민왕따가 되어버렸다. 특히 그때는 나를 괴롭히는 주동자 아이가 무리를 선동해 늘 나를 게임에 끌고 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술래를 시켰고, 급식에 귤이 나온 어느 날에는 "폴순아 맛있게 먹어"하며 내 귤에 연필을 꽂아버리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는 잔인했던 기억, 그래도 귤 상해사건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매일 백 원, 이백 원씩을 빼앗던 주동자는 점점 대담해져 천 원, 이천 원을 요구했는데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아빠의 지갑에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천 원이라 몰랐던 걸까 아니면 딸을 살뜰히 챙기지 못한 게 미안해 그냥 눈 감아줬던 걸까 그렇게 나의 3학년은 침울하게 흘러갔고 점점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렸다.
(부모의 이혼이 아이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는 건 아니고, 주변의 말 한마디에 따라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 가를 말하고 싶었다.)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겪기엔 너무나 큰 시련만이 가득했던 1년이 지나고, 꾸역꾸역 4학년에 진학했다. 지난 1년 동안 나를 괴롭혀온 주동자 아이가 전학을 갔다는 소식과 함께, 누가 봐도 예쁜 아이가 새로 전학을 왔다.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달리기까지 잘하는 그야말로 퀸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퀸은 나의 짝꿍이 되었고 지금의 나는 이때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