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연작

줄 서는 아저씨

by 방덕붕

독산역에서 내렸어. 출구로 나가려면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플랫폼 한가운데쯤 있어서 사람이 많으면 양쪽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초입에서 엉키곤 해.


순방향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줄을 서지만,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그 줄 끝까지 가려면 좀 돌아가야 하거든. 시간이 아깝다 싶으면 그냥 새치기해서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아.


나는 이미 줄을 서 있었어. 그런데 6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반대편에서 오더니 줄 뒤로 가려고 하는 거야. 내 앞쯤 왔는데 통로가 좁아서 못 지나가는지, 다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갔다가 줄을 가로질러 반대로 가서 다시 내 쪽으로 오는 거야.


어쨌든 줄 제일 뒤로 가려고 했던 것 같아.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해 보여서 웃음이 나더라고. 다들 새치기해서 올라가는데, 저 아저씨는 정직하게 줄을 서려고 하잖아. 복잡한 동선을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그래서 내가 내 앞으로 서라고 손짓을 했어. 처음엔 못 보더니 나중에 내 앞에 섰어. 딱히 고맙다는 말을 하거나 고개를 살짝 숙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왠지 자꾸 웃음이 났어.

뒷사람들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다들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고, 금방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으니까.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서 아저씨를 다시 봤어. 찬찬히 보니 아침에 샴푸를 안 했는지 머리엔 까치집이 있고, 약간 피곤한 얼굴에 어딘가에 갈 일정에 좀 늦은 것 같더라고.


늦었는데도 정직하게 줄을 서려고 했던 거야.


왜 자꾸 웃음이 났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때는 양보라는 게 낭만이었거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맛있는 걸 친구에게 쿨하게 넘겨주는 것들.


옛날 청춘물 같은 거 보면 그런 장면 나오잖아.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친구도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그 여자에게 고백하려는 친구에게 멋진 조언을 해주고는 쿨하게 돌아서서 윙크 찡긋. 시라노처럼 말이야. 손해보는 건데도 왠지 멋있어 보이던 그런

낭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양보하면 손해고, 정직하면 바보 같고, 줄 서면 뒤처지는 세상이 됐잖아. 다들 조급하게 앞서려 하고, 새치기가 당연해졌고.


그래서 아저씨가 순수해 보였던 거 같아. 복잡한 동선을 따라서라도 줄을 지키려 했던 그 모습이,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낭만이었던 거지.


혹시 나만 이상하게 본 건가? 다른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아침 풍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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