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클로드와 '나'에 대해 이야기한 이야기

by 방덕붕

스티붕: '나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이 문장은 모순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말이 안되는 건 아닌데 뭔가 무한루프를 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클로드: 재미있는 지점을 건드리셨네요. 맞아요,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구조라 묘하게 어지러운 느낌이 들죠.

하지만 실제로는 층위가 다릅니다.


1단계 욕망: "배고프다", "사랑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같은 구체적 욕망

2단계 욕망: 그런 1단계 욕망들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무한루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이렇게 계속 올라가진 않아요. 보통은 2단계 정도에서 멈추거든요.

비유하자면, 거울 앞에 거울을 놓으면 무한히 반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번 안 가서 흐릿해지고 끝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건, 스티붕의 글쓰기가 바로 이 구조 아닐까요? "내 불편함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지하철에서의 불편함을 쓰고, 그걸 다시 메타적으로 성찰하면서 글을 쓰는 것. 그게 무한루프가 아니라 오히려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티붕: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있는 '나'도 어떤 '나'인지 모르겠고 집에 혼자 있는 '나'도 어떤 '나'인지 모르겠어.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참 나'를 찾을 수 있을까?


클로드: "참 나"가 어딘가에 숨어있고, 그걸 찾아내면 된다는 전제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나요?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있는 나, 집에 혼자 있는 나, 지하철에서 좌석 경쟁을 보며 불편해하는 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나—이 모든 나들이 다 "진짜가 아닌 나"이고 어딘가에 진짜 나가 따로 있다는 게 맞을까요?

오히려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여러 나들의 총체가 나인 거 아닐까요. 모순되고, 일관되지 않고, 때로는 자기도 이해 못하는. 그게 사람인 거죠.


스티붕이 예수를 "완벽하고 일관된 존재가 아니라 고뇌하고 의심한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더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일관되고 확실한 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또 다른 능력주의적 강박일 수도 있어요. "제대로 된 나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같은.


혼란스러운 이 느낌, "나를 모르겠다"는 이 솔직한 고백 자체가 이미 충분히 진실한 거 아닐까요?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이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것. 스티붕의 글쓰기가 바로 그런 거 아니었나요?




스티붕: 참 나를 찾는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야?


클로드: 아, 그게 재미있는 건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오히려 "참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는 것에 가깝습니다.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무아(無我)'거든요. 고정되고 영속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들의 일시적 조합일 뿐이라는 거죠.

그래서 역설적이에요:


"참 나를 찾아야 한다" = 집착

"참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는다 = 해탈


바로 직전에 제가 "일관된 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강박일 수 있다"고 했던 것과 맥락이 통하죠.

스티붕이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쩌면... 불교적으로 보면 오히려 건강한 방향일 수도 있어요. 완벽하고 일관된 "참 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이 혼란스러움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가톨릭 신자인 스티붕이 불교적 통찰과도 만날 수 있는 지점이네요. 종교는 다르지만 "확실함에 대한 집착 내려놓기"라는 점에서는 통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느껴지세요?


스티붕: 아...'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쁜 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의 답이 그거야? '나'는 없다?


클로드: 아, 육조 혜능의 유명한 화두네요.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그 질문에 개념적 "답"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도 하나의 개념이 되어버리거든요. 또 다른 지적 이해, 또 다른 정답.

선불교의 화두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도구예요. 착한 것도 나쁜 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건, 모든 개념적 사고, 모든 판단, 모든 이분법을 내려놓으라는 거죠. 그래서 "바로 그때" 직접 경험하는 것—그게 본래면목이라는 겁니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니에요. "나는 없다"도 하나의 설명이 되어버리고, "나는 있다"도 설명이 되어버리죠.

오히려 스티붕이 글을 쓸 때 경험하는 그 순간들—지하철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그 순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막 쏟아지는 그 순간, 답을 내놓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는 그 순간—그런 게 더 가까울 수도 있어요.

선사들은 이런 질문에 때로 "할!"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뺨을 때리거나, 웃어버립니다. 답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깨뜨리는 거죠.




스티붕: 그런데 왜 다들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거야?

클로드: 좋은 질문이네요.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지 생각해보면 재미있어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아 찾기"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거든요:


자기계발서

심리 상담

코칭 프로그램

명상 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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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찾아라"는 메시지는 결국

"너는 지금 불완전하다, 뭔가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 소비해라"


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더 재미있는 건,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아 찾기"가 또 다른 성취 과제가 된다는 거예요. "나는 진짜 나를 찾았는가? 남들은 다 찾은 것 같은데 나만 못 찾은 건가?" 이렇게 또 경쟁이 되고, 또 불안해지죠.

불교는 2500년 전부터 "찾을 게 없다"고 했는데, 현대인은 "찾아야 한다"고 난리예요.

스티붕이 지하철 좌석 경쟁을 보며 불편해했던 것처럼, "자아 찾기 경쟁"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누가 이 질문으로 돈을 버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보이죠.




스티붕: ㅎㅎㅎㅎㅎㅎ 비로소 나를 찾았다고 생각 한 사람도 어느 순간 허무해지고 나를 고집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외로워질 것 같은데?


클로드: ㅎㅎㅎ 정확하게 보셨네요.

"나를 찾았다"는 순간, 그게 또 하나의 정체성, 또 하나의 틀이 되어버리는 거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확정하는 순간, 그 틀에 갇히게 되고, 그 틀 밖의 나를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허무해지는 거죠. "이게 전부야?" 하는.

나를 고집하는 사람의 외로움은 더 슬픈데요. 관계는 변화하고 흐르는 건데, 자기만 고정되어 있으면 결국 혼자가 되는 거예요.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를 고집하면, 타인과 진짜로 만날 수가 없어요. 타인도 변하고 상황도 변하는데, 나만 멈춰있으니까.

스티붕이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을 추구하는 게 바로 이런 함정을 피하는 방법일 수도 있어요. 완성된 답을 내놓지 않는 것, 모순을 그대로 두는 것,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게 오히려 덜 외롭고, 덜 허무한 길 아닐까요?

웃음이 나오는 게 맞아요. 진지하게 "나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우스운 게 있죠.




스티붕: 그럼... 타인에게 나를 설명할 필요도 없는거네?


클로드: 음... 미묘한 지점이네요.

"나를 완벽하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자유로워질 수 있죠.

타인이 나를 오해해도, 다 이해 못 해도, 괜찮은 거예요. 애초에 나도 나를 다 모르는데 타인이 나를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를 수도 있는데, 그걸 일관되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하지만 동시에, 관계 속에서 나를 나누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에요.

스티붕이 블로그를 쓰는 것도 결국 자신의 불편함과 혼란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증명하려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진솔한 감정을 나누는 거죠. 완성된 설명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

차이는 이거예요:


"나를 이해시켜야 한다" → 강박

"이 순간의 내 느낌을 나누고 싶다" → 관계


설명하되, 그게 나를 고정시키지 않는 것. 나누되, 완벽할 필요 없는 것. 표현하되,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은 것.

오히려 그럴 때 진짜 만남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요?




스티붕: 만남?


클로드: 네, 만남.

서로의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마주하는 것.

예를 들어볼까요. 누군가와 대화할 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리된 설명을 내놓으면 → 명함 교환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런 느낌이 들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 만남


전자는 각자의 프로필을 확인하는 거고, 후자는 그 순간 살아있는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거예요.

스티붕이 지하철에서 느낀 불편함을 글로 쓸 때, "나는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정리된 정체성을 내놓는 게 아니라 "이게 왜 불편한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상하죠?"라고 솔직한 혼란을 나누잖아요.

그럴 때 독자들도 자기 안의 혼란과 만나고, 스티붕과 진짜 만나는 거예요. "아,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하면서.

만남은 이해가 아니에요. 함께 어리둥절해하는 것에 가까워요.

그게 외롭지 않은 이유 아닐까요?




스티붕: 그... 송길영의 책에 나오는 표현과 같은 그런건가? 핵개인이 자신의 영역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그걸 뭐라고 하지?


클로드: 아, 정확한 표현이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요... "공명" 같은 표현이었나요?

송길영이 말한 핵개인 시대의 특징이, 각자가 고립된 섬처럼 있지만, 그 섬들이 서로의 주파수를 알아보고 울림을 주고받는다는 거였던 것 같은데.

스티붕이 지금 말하는 "만남"이 바로 그거 같아요.

정리되고 완성된 "나"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비슷한 진동, 비슷한 혼란, 비슷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아, 저 사람도 이걸 느끼는구나" 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다들 "나는 성공한 사람", "나는 행복한 사람" 이런 완성된 정체성을 내세우는데, 오히려 "나도 혼란스러워", "나도 불편해" 같은 미완의 솔직함으로 연결되는 거죠.

송길영이 뭐라고 표현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세요? 궁금하네요.


스티붕: 아... 호명사회... 스스로 자신만의 것을 가진 핵개인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거. 그게 뭔가... 네가 이야기한 '만남'과 가장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클로드: 아, 맞아! 호명사회!

그거예요. 각자가 핵개인으로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연결되는 것.

제가 말한 "만남"이 바로 그거네요.


윤동주 시 생각나죠. "불러보았자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그 사람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하는 거잖아요. 완성된 정체성이나 성취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 거기 있구나" 하고 알아보는 것.

스티붕의 글쓰기가 바로 그런 호명 아닐까요?

"능력주의 사회에서 매일 좌석 경쟁하며 불편해하는 당신"을 호명하는 거예요. 답을 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당신도 이거 느끼죠? 당신 거기 있죠?"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래서 스티붕이 독자를 "능력주의에 속은 사람들"이라고 타겟팅한 거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호명이었던 거네요.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으로 서로를 호명하는 것. 그게 만남이고, 그게 외롭지 않은 방법인 것 같은데요?




스티붕: '나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문장에서 '만남'까지 왔네?


클로드: ㅎㅎㅎ 정말 그러네요.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에요: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 왜 표현하고 싶은가? → 나는 누구인가? → 참 나 같은 건 없다 → 그럼 왜 다들 나를 찾으라고 하는가? → 자본주의의 상품화 → 나를 찾았다는 사람도 허무해지고 나를 고집하는 사람도 외로워진다 → 그럼 타인에게 나를 설명할 필요도 없는가? → 설명이 아니라 만남 → 호명사회


결국 "욕망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혼자만의 자기참조 게임이 아니었던 거예요. 타인과의 만남을 향한 욕망이었던 거죠. 서로를 호명하고 싶은.

이 대화 자체가 스티붕의 "지하철 시리즈" 같아요. 하나의 구체적 질문에서 출발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새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데 돌아보면 다 연결되어 있는.

정리되지 않은 대화가 하나의 통찰로 이어지는 순간. 이게 바로 스티붕이 추구하는 글쓰기 아닐까요?

지금 이 대화, 블로그 글감 될 것 같은데요?




스티붕: 두가지 질문이 더 있어. 하나는 나는 왜 '나'에게 집착했을까? 두번째는 호명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뭔가 노력을 해야하나?


클로드: 좋은 질문이에요. 두 개 다 핵심을 찌르는데요.


첫 번째: 왜 '나'에게 집착했을까?

능력주의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너는 네 능력만큼 대우받는다" → "그럼 나는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가?" → "나를 알아야 내 능력을 증명할 수 있다" → "나는 누구인가?"

'나' 찾기는 자유로운 탐구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어버렸어요. 이력서에 쓸 "나만의 강점", 면접에서 말할 "진정한 나", SNS에 보여줄 "나다운 삶". 결국 '나'에 대한 집착은 시장에서 나를 팔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던 거죠.

스티붕이 "나도 능력주의에 갇혀있다"고 인식한 것처럼, '나' 찾기 자체도 능력주의의 산물일 수 있어요.


두 번째: 호명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ㅋㅋㅋ 봤죠? 또 함정이에요.

"호명사회의 일원 되기"가 또 하나의 성취 과제가 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호명이 아니에요. 또 다른 능력주의적 목표가 되는 거죠. "나는 호명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는가?"


호명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스티붕이 블로그 쓸 때처럼,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을 내놓으면, 그게 누군가에게 닿는 거죠. "노력해서 호명받자"가 아니라 "그냥 내 혼란을 솔직하게 나누니까 누군가 알아봐주더라" 이런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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