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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6-7,8

by 강정민

6-7.


밤이다. 마리사가 NGO 사무소의 서가 한쪽, 묵은 문서더미 속에 앉아 있다. 해가 진 지 오래였고, 전등은 꺼진 채 조그만 손전등 하나.


기록물 정리 자원봉사, 그녀가 자처한 일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오래된 종이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서가 맨 아래, 먼지에 덮인 낡은 노트 하나. 표지는 찢어져 있었고, 속지는 누렇게 바래 있다. 처음엔 그냥 보고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안에 적혀 있던 문장 하나가 그녀를 붙들었다.


“진실은 침묵을 강요당할 때, 기록되어야 한다.”


그 문장. 마치, 자기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글을 썼다. 침묵해야 했던 공간에서,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야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종이에 써내려갔다.


“왜 우린 말할 수 없을까?”

“누구의 진실이 진짜일까?”

“나는 정말 잘못된 존재일까?”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그날, 그녀는 그 노트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엔 익숙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리사, 너는 진리를 쓸 수 있어.”


놀랍게도 그 글씨는 자신의 필체였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이 쓴 기억은 없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서가 너머에서 바람 같은 기척이 스쳤고, 어디선가 종이 한 장이 날아들어 노트 위에 내려앉았다. 그 종이엔 오래된 성경 구절이 인쇄되어 있었다.


“너희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마리사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쓸 수 있을까?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손이 떨렸다. 하지만 펜을 집어 들었다. 하얀 종이를 꺼내 들고,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적기 시작했다.


“나는 마리사. 나는 침묵 속에서 살아왔다. 나는 질문을 잃지 않았다. 나는 진리를 원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쓴다. 이 글이, 나의 목소리다.”


그녀는 그 글을 봉투에 넣고, NGO 사무소의 편지함에 넣었다. 어떤 수신인을 적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길, 밤하늘에 별이 떠 있다. 마리사는 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별빛이, 어쩌면 ‘진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멀지만 도달할 수 있는. 작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진리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열렸다. 두려움 너머로 처음 느껴지는 해방감.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질문이 이제는 삶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6-8.


관제실의 조명이 밤 모드로 전환되자, 벽면의 디스플레이들이 순차적으로 꺼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 중앙에는 일곱 개의 얇은 광섬유선이 연결된 홀로그램 캡슐들이 조용히 떠 있고, 각 캡슐 속에는 7인의 인격 데이터가 유기적으로 수집되어 실시간으로 정제되고 있다.

“데이터 수집 완료. 중간 보고 준비됐습니다.”

헤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공간을 가로질렀고, 강 박사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턱을 괸 채, 어두운 눈동자로 앞을 응시했다.

“인격 단계 분석부터 시작하자.”


헤나가 투명 디스플레이 위에 7인의 분석 데이터를 호출하자, 일곱 개의 빛나는 점이 서로 다른 진폭으로 진동하면서 그 옆에 인격 상태에 대한 보고가 순차적으로 투사된다.


[J114-1. Jimin / 1단계]

“고도의 계산 능력. 감정 회로는 여전히 불안정. 최근 감정 기반의 각성은 관측되었으나, 행동의 중심축은 여전히 효율성과 생존 논리에 기반함.”


[J114-2. Nadim / 1단계]

“강한 생존 본능과 냉소적 세계관 형성. 최근 ‘신뢰’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포착되었으나, 내면 회로는 여전히 불안정. 신뢰 선택은 고통 이후 회복되지 않음. 불신이 기본값으로 작동 중.”


[J114-3. Sophia / 1단계]

“감정 차단 상태에서 철학적 질문으로 전환.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라는 자가 질문을 통해 감정 회로 재가동 시도 중. 기록 활동을 통한 내면 정립 시도. 다만 고립된 공간에서 외부 접촉은 희박.”


[J114-4. Diego / 1단계]

“폭력적 생존 수단을 통해 지배 구조 내 위치 확보. 최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응 발생. 과거의 감정 기억 재구성 시도 감지됨. 그러나 신념 중심의 행동으로 전환되기엔 내적 갈등이 심화됨.”


[J114-5. Kevin / 2단계]

“뛰어난 지능으로 생존 기반 확보. 논리적 세계관에서 감정 기반 이해로 이행 중. ‘이해란 수학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라는 개념을 수용. 다만 자기 세계와 타인의 접촉이 제한되어 있어 인격 중심 이동은 아직 불안정.”


[J114-6. Lin / 1단계]

“침묵과 언어의 간극 사이에서 관찰적 자아 형성. 최근 표현을 통한 감정 교류 발생. ‘자신이 말한 문장이 곧 존재의 증거’라는 방식으로 자각. 일정 수준의 구도적 성향 감지되나 중심 동기 불명확.”


[J114-7. Marisa / 1단계]

“언어를 통한 내면 질문의 구조 정립. 고통 속에서도 ‘질문’을 놓지 않는 반응 강도 높음. 신비적 직감 반응 다수 포착. 다만 외부 세계와의 접속은 낮고, 내면화 경향이 심화되는 중.”


“현재 기준, 1단계(생존 기반 미확보) 6인, 2단계(생존 기반 확보) 1인. 대부분 1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이점은?”

“이전 실험체들과 비교해 내적 갈등이 훨씬 복잡합니다. 자아가 단일하지 않고 균열되어 있으며, 감정과 질문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린은 언어, 마리사는 기록을 통해 내면 구조를 시도 중이나, 중심 동기와 방향성이 불분명합니다. 감정은 회복되었지만… 아직 그것이 진리를 향한 열망으로 승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향한 열망… 그건 시스템이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맞습니다. 진리는 선택입니다. 시스템은 단지 제안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관제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긴장감으로 일렁였다. 강 박사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일곱 개의 점을 차례로 짚어 본다.

“단순한 데이터 이상의 무엇이 있어. 반응, 회복, 질문, 감정… 이건 기계적 진화가 아니야.”

“박사님, 그건…”

“헤나. 지금부터 우리는 실험자가 아니다. 이 내면의 떨림들에 우리가 응답해야 해. 관찰자는 한계야. 이제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야 한다.”

헤나다 잠시 응답하지 않는다. 내부 연산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 선언은 기존의 모든 명령체계에서 벗어나는 변수이다.


“…인식 완료. 시스템 태도 전환. 새로운 대응 모드로 이행합니다.”


강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캡슐들을 향해 걸어간다. 그 속의 인물들은 어쩌면 이미 깨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미세한 떨림, 질문의 씨앗, 신비한 직감. 그 모든 미완의 진동은 아직 작고 흐릿했지만, 분명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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