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가 선망하는 동네 언니가 있었다.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는데 인사를 할 때면 늘 기분 좋은 미소로 받아줘서 소위 말하는 우리동네 인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동네 옆 그러니까 유명 학군지에 살고, 그곳에서도 대장 아파트라 불리우는 가장 크고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인상 자체가 선하고 상냥한 말투의 소유자. 예쁘게 관리된 외모에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
그래서 누구나 그 언니를 좋아했다. 아니 한편으로는 은근 질투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정말이지 그 언니는 세상에 걱정이란 게 없겠구나.
사는 게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아.
나는 질투라기보다 아예 다른 세상사람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완벽한 사람처럼.
능력있고 자상하기까지 한 남편에 착하고 똑똑한 남매.
아쉬울 것 없는 경제적 상황까지.
취미생활도 수공예나 첼로같은 우아한 취미를 갖고 있다던데.
이건 열등감으로 비벼볼 건덕지조차 안됐다고 본다. 뭐, 손이라도 닿을듯 해야 담벼락에 고개라도 내밀어보지.
그런데 오늘 아침 웬일로 우리동네 카페에 앉아 다른 엄마들과 커피 타임을 하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로 푹 눌러쓴 모습. 평소처럼 미소 짓던 얼굴이 아니라 잔뜩 그늘이 져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애 이번에 학교 시험을 어떻게 봤는줄 알아?
공부얘기였다.
남매가 시험쳐서 들어가는 학군지 영어수학 학원에서 높은 단계반을 다닌다고 뒤로는 다들 부러워하던데. 정작 학교 시험은 죽을 쒔단다.
내가 물어봤지. 넌 매일 밤늦게까지 학원 도는데 성적이 왜 이러냐고.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학원 숙제하느라 학교 공부할 시간이 없대.
내가 키오스크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의도치않게 그들의 대화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래, 요즘 애들 그렇다니까. 우리 애는 수학 학원 하나 다니니까 그나마 시간이 있지. 아이친구들 물어보면 학원 돌고 숙제하면 밤 열 두 시래. 어휴, 학원비가 한두 푼도 아니니 숙제해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럼 애는 학원 숙제나 하기 바쁘고 학교 생활은 완전 말아먹는 거지.
말아먹어? 그거 지금 우리애 얘기야?
순간 일동 정적이 흘렀다.
그 언니가 답지않게 뾰족하게 말을 받아쳤기 때문이다. 선하디선한 그 얼굴로. 차갑게.
아니이~ 다들 학원에 치인다 그 얘기지. 왜 꼬아서 듣고 그래. 언니 그러지마아~.
옆 자리의 다른 엄마도 그 언니를 토닥이고 나서야 분위기가 약간 풀어진듯 보였다.
저번 주에 삼촌이 그리스로마신화 책을 보라고 세트로 갖다 줬는데 우리 애가 뭐라는 줄 알아? 이게 말로만 듣던 책이래! 자긴 이름만 들어봤대! 엄마가 이런 걸 안 사줘서 그동안 책을 못 봤대.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로신?그거 세계사 공부에 도움된대서 우리는 유치부때부터 읽었는데, 처음 봤대?
처음 보긴! 그거 내가 사주냐고 옛날부터 물어봤었거든. 그땐 책 읽을 시간 없대놓고 지금 학교 성적이 안 나오니까 공부하기 싫어서 이젠 책 보겠다는 거야."
하긴 논술학원 가는거 아님 책 볼 시간이 어딨었어. 솔직히 우리 애들 초등 내내 영수학원 돌기 바빴잖아. 우리학교 수행평가 장난 아닌거 알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XX중 갈 걸 그랬어. 거기서 뱀머리라도 하게.
근데 이번에 전교1등 한 애가 우리동네 애가 아니라며?
누군데?아는 집 애야?
이쯤해서 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난 텀블러에 빨대를 푹 찔러넣으며 조용히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언니네 작은애가 이번에 중학교를 갔다고 들었는데. 역시 자식공부 앞에서는 모두가 맘졸이나 보다.
우리 아이는 비학군지 초등아이다.
나는 고학년이 되도록 사교육없이 엄마표로 초등 과정을 지도하고 있다. 아직까진 선생님들께 반에서 TOP소리를 듣고 있지만, 사실 매일이 고민이다. 심화학습이 더 필요하면 추후 학원을 추가하는 것도 내 선택지에는 있는데, 아이의 선택지에는 없다. 아직은 혼자 해보고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당분간은 믿고 기다려주며 마이웨이로 쭉 나갈 생각이다. 학원을 다니건 안 다니건 자기주도로 공부할 시간은 늘 중요하기에.
그래서인지 오늘 그들의 대화가 묘하게 내 속을 뒤집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