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다만 설아에게, 네 이름을 부를 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지친 마음에 네가 떠오르는 일이 그만둬질 것 같았다. 그리운 것도, 희미한 것도, 모두 시간만이 알 수 있는 진실. 삶에 대한 너무 깊은 고려는 정체를 낳는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경험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나약한 소설가의 경험은, 시간만이 이길 수 있는 슬픔이로되, 나는 슬픔의 활을 잡고 시간의 현을 켜 경험의 교향곡을 썼다. 보통의 사람들은 악보를 읽을 줄 몰라 내 곡을 지나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한 가지 상황에 오직 한 가지의 말만이 부합한다고 말했다. 일물일어설, 요컨대 그것은 글쟁이의 정언명령이고 정확, 적확, 적절, 정합의 4요소를 아우르며 예술가의 완벽주의에 다름 아니다. 과연 언행일치, 플로베르는 생생한 필치로 19세기 프랑스를 그려냈고 카프카로부터 소설가의 전범(典範)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아직껏 세계 문학사의 귀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커다란 이해 없이, 시한부를 선고받은 나약한 소설가의 경험으로 바라보건대, 일물(一物)에 일어(一語)란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무용하다. 플로베르가 되었든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었든 릴케가 되었든 올리버가 되었든 셰익스피어가 되었든 프롬이 되었든 보통이 되었든 지훈, 동주, 육사, 형도, 지용이 되었든 훈, 강, 혹은 어쩌고 저쩌고 어중이 떠중이가 되었든 다 말이 다르다. 설마 플로베르 같은 거장의 입에서 사랑은 사물이 아니지 않냐는 같잖은 말이 튀어나올 리 없으므로 내 말은 옳고 그는 화나고 부끄러워 무덤에서 발차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실은 얼마 전에 설렁탕집에서 만난 교수가 내게 그-일물일어설-이야기를 꺼냈다. 난 마늘을 하나 집어들며 "파블로 네루다는 이를 보고 '아름다운 상아'라고 했다는데, 일물에 일어입니까?"했더니 교수는 내 좁은 속을 비판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밥을 맛있게 먹고 교수님과 헤어지는데,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덜컥 눈물이 났다. 난 그와 같은 흰머리의 추억도 하나 남겨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 땜에 눈물이 났냐면 하수다. 그의 뒷모습에서 덩그러니, 설아야, 네 생각이 나버린 거다.
윤상, 사랑이란
언젠가, 내용은 전혀 모르는데 액자의 사진 하나만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네모네모 스낵보다 네모난 할아버지가 집이 매달린 풍선을 타고 내려오는 포스터였는데, '네모의 꿈' 작사가가 보면 꽤나 즐거워하겠다는 우스운 얘기로 우린 킥킥거렸다. 너는 나의 농담을 좋아했고,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분명 반쯤 거짓이거나 괜히 남자다울 심산으로 과장한 걸 알면서도 눈을 반짝이곤 했다.
그 2D 영상을 보며 난 졸았지만 넌 나와서 한참 동안 감상을 이야기했고, 아마 내가 꽤나 열심히 봤다고 착각한 것 같다. 아니, 네 얘기에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어. 나는 그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담은 액자, 액자를 쳐다보는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단잠을 이뤘거든. 그것도 모르고 넌 열심히 떠들었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묻는 네가 사랑스럽기만 했던 난 다가올 날들에 꽂힐 비수를 짐작조차 못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있어도, 도서관에 죽치고 시간을 죽여도, 베버가 청교도라는 걸 어디선가 주워들은 대로 독립서점 직원에게 말을 붙일 때도 난 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얼마 전 죽기 전 연극을 해보리라 결심해놓고 최소 1년은 말단에서 일해야 무대에 세워준다는 겁박에 포기했다. 말단의 자격지심은 견딜 수 있지만, 1년, 그건 내 관할이 아니리라. 이후 서울을 전전하다 평소 존경하는 교수를 찾아갔지만 그의 언변에 금세 질려버렸다. 자신감을 잃은 채 떠나려던 찰나, 그의 뒷모습이 변수였다. 난 울었고 주저앉았으며 고통스러웠다. 와중에 내 고통이 남의 고통보다 더하지 못할 것 같아서-어느 지성인은 감옥에 갇혀서도 본인보다 이웃이 더 슬프다고 생각하라 가르치는데 난 이걸 받아들이고 말았다-혼란스러웠다. 낙엽이 산산이 흩어지는 거리로 나갔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생각했다. 나는, 원망스럽게도 나는, 바라지 않았던 대로, 나는, 지리멸렬, 산산이 흩어져 유설아, 흩어지고 무너져 유설아, 폭발음 속에서 유설아, 유설아.
그래, 설아야. 난 너 없이 외로이 시한부의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