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모으는 사람

by 유인도

발걸음마다 울고 웃다

박효신, Beautiful Tomorrow



다만 설아에게,

헤어진 뒤에 줄곧 너를 생각하는 글을 썼는데 한 번을 봉투에 담아보지 못했다. 너는 소포를 보냈고 라디오에 사연까지 썼으니 나보다 낫다. 설령 효성과 함께였거나 다른 누구를 위해서였대도 상관없다. 그럴 수 있다. 너의 잘못이 아니거니와 그의 탓 또한 아니다. 차라리 내 탓이라 하자.

오는 길에 마주친 아몬드나무 앞 녹슨 우편함에 편지를 넣었다. 수신자 주소란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반송되거나, 우편함과 함께 늙거나, 누군가 너와 관계없는 이에게 읽힐 것이다. 높은 확률로 버려지겠지. 기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나 대신 용기내 주기 바란다. 이 세상 어딘가 버려진 편지들을 모아 유리병 속에 넣어 보관하는 곳이 있다면-아마 섬이나 바다 한가운데, 혹은 어느 폐역이나 숲속에 있을 것 같은데-기적이 거기까지 닿길 바란다.

설아야, 나는 너에게 음악으로 세상을 제패하리라고 약속했다. 멋진 소설을 써낼 것이라고, 꿈을 이루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언제나 나를 믿겠다던 너의 말이 내내 남아서,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이처럼 글을 써왔다. 책 몇 권의 분량이 네가 읽을 한 장의 편지 뒤에 있으므로 너는 불행할 필요가 없다. 만일 누군가 이 글들을 소설로 여긴다면 나는 오직 너에게 감사하겠다. 우리는 수기를 적었기 때문에 거짓말 같아도 별 도리가 없다.

설아야, 기적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면 내가 용기를 내겠다. 언젠가 네가 삿포로 기행록을 전진배치한 내 감각의 비망록 전문을 읽게 된다면, 읽다 못해 여기까지 온다면, 네가 가장 좋아했던 나와 싫어했던 나, 알 필요 없는 나까지 모두 참아냈다면, 그날 녹슨 우편함에 든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 여행은 삿포로에서 멎을 것 같다. 잔명을 토대로 예상하면 그렇다. 내 글들은 계획대로라면 겨울, 봄, 여름, 가을의 순서로 몇 년을 아울러 엮일 것이다. 마지막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올 것을 약속한다. 돌아와 계획을 마칠 때까지 살아보겠다.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설아야, 네가 나를 생각할 것 같다. 네가 나를 생각하고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쓴 것 같다. 고맙구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여름의 언어를 잊지 못하는 내게 여전히 여름은 겨울만치 시리다. 떠내려가는 조각구름에 보랏빛 바람이 불던, 내게 사랑은 어느 시골의 저녁놀이었고 지친 퇴근길의 위로였다. 이제는 서로의 곁을 지켜줄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우리의 사랑 속에 바래지 않는 무언가 있다고 느낄 것 같다. 내일은 오늘과는 다른 기쁨과 설움으로 또 어느 걸 잊고 기억해낼 것이다. 하지만 네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쯤은 언제나 믿게 된다.

나는 마음속에 미술관을 하나 지었다. 방 한 켠에 풍경화를 모았고, 그곳에 너의 주마등을 두었다. 일련의 시간이 지나 새로운 바람들로 벽을 칠하면 전람회는 제법 화려해지겠지. 하지만 너의 이름과, 이름을 닮은 화실과, 한 필씩 꽂아둔 추억은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걸 가슴 한가득 품기도 하고, 때로는 미워도 했다. 너는 간직하고 있을까? 한 걸음씩, 한 걸음 더 가려던 나의 이름을.

우리가 처음 나눈 가을의 언어는 봄처럼 다사로웠고 영원히 바람의 미술관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오래 전에 너를 용서했고, 너를 사랑한다.



*본 편은 "감각의 비망록" 4부 '무사히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의 마지막 편이자, 전체의 마지막 편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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