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신고

by 유인도

어디든 가자 그게 어디든

서동현, 몽유 (feat. 그냥노창)



슬픔이 먼저 떠나 파도 앞에 서 있었다. 돌아보면 너는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도 내 삶을 설명하기를 원치 않는다. 한 해 동안 삼킨 고독과 끝내 터지지 않던 눈물이 파도와 풀이 되어 서로를 노려본다. 나를 향한 시선들을 기대하며 허송하길 수 년, 이제는 정신 차리라던 말들도 다 지나간다.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파도가 치는 겨울 정오, 나는 끝내 눈물 흘리지 않았다. 돌담에 기대거나 꽃을 꺾지 않았고 또한 오랫동안 걸으며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했다. 파도가 발끝까지 부딪쳐 들어오는 바위 끝에 서서, 머리카락에 붙는 모래를 떼지 않으며, 난 오로지 순간을 바로 보려 노력했다. 바다는 한사코 밀려들었다. 간혹 철갑상어 대가리와 서해부터 몇백 킬로미터를 달린 장난감 버스 따위를 남겼다. 바람은 북에서 북동쪽으로 불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맹렬하게 불었다. 12시간 전에 오리온자리를 남에서 남서쪽으로 옮긴 바람과 같을까? 장난감 버스처럼 몇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걸까. 만일 그렇다면, 바람은 이곳의 바다가 빠져나갈 때쯤 나와 다시 만날 것이다.

파도의 끝을 이은 곡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뛰었다. 발자국이 시시각각 물속에 잠겼다. 돌아보면 마치 아무도 그곳을 건너지 않은 것처럼. 어떤 영혼도 그곳에 영원히 머물 수 없을 것처럼. 점퍼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반대쪽 눈을 질끈 감고 포말에 렌즈를 조준했다. 파도가 모래의 중앙에 놓이는 순간을 기다렸다. 셔터를 누르고서야, 태엽을 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태엽을 감는데 뚝 소리가 났다. 파도는 끊임없이 순간을 재구성하여, 노력한들 방금 전과 같은 곡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순간만이 붙들 기회를 주면서도 결코 붙들리는 법이 없다.

언젠가는 바다 앞에서 사람을 쐈다고 한다. 고정값이 없는 해안선의 굴곡이 망자들의 단체줄넘기 같았다. 생각하니 허전하여, 반대편으로 뛰는 대신 해안도로로 걸어갔다.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설아야. 삶은 그러지 못해도 순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찰나의 기쁨을 경계해왔다. 그러다 보면 내 삶 전체를 기쁨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 희미한, 어쩌면 겪지 못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순간들을 버리는 게 이제 와서는 어리석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붙들려는 순간마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채우지 않은 필름이나 돌리지 않은 태엽처럼 별 것 아닌 누락으로 놓치는 게 부지기수일 것이다. 고작 몇십 걸음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의 근저에 죽음이 도사린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끝까지 삶 전체에 대한 기대로 일관할 수는 없다. 기억이 순간처럼 사라지는 삶 속에서 더는 너를 그리워할 수 없다. 너는 해풍 속의 한 가닥 포말 같다. 네가 내리지 않는 한 운행은 끝나지 않고, 네가 떠나지 않는 한 파도는 밀고 들어온다. 그 모든 순간을 내가 빠짐없이 느끼고, 넌 바람이 무늬를 낸 백사장에 스며들어 사라지겠지. 낮고 조용히, 아름답게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왔던 바다에서 쓴다. 너와, 그리고 재인과 왔다. 재인은 너를 알지만 너는 재인을 모르며 어차피 너희는 둘 다 내 곁에 없다. 게다가, 이 도시의 모든 익숙한 길을 지나쳐 오는 동안 나는 너와 재인 중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음만 밝혀 둔다. 그녀는 하나뿐인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다 그렸을까. 아무래도 난 길을 잃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순천만에는 가지 않겠다. 남은 것들은 그대로 남겨둔다. 종성의 말대로 삿포로에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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