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by 유인도

15센티미터 정도 열어둔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종성이 내뱉은 궐련형 전자담배 연기가 형광등 언저리에 부딪혔다.

- 강물 같다.

- 응?

- 바위를 타넘는 강물.

참 그다운 발상이라며, 나는 종성의 시선을 좇아 연기가 창밖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밖은 곧 눈이 내릴 것처럼 적요로웠다.

- 갈 수 있을까?

- 어딜.

- 순천만.

나는 무릎을 껴안고 그 틈에 고개를 묻었다. 종성은 계속 말했다.

- 기왕에 갈 거면 멀리 가자.

- 어디로?

- 삿포로.

그에게 순천만에 가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므로 종성의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성을 데리고 갈 이유 또한 없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다면. 외로움이 설아를 생각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면. 설아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런 나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다면.

- 무슨 생각해?

종성이 날 빤히 보았다. 대답 대신 웃으며, 난 길다란 맥주잔에 일본 산 캔맥주를 부었다. 거품이 잔 꼭대기에 걸려 부르르 떨었다. 종성이 급하게 입을 갖다대려는 걸 나는 막았다.

- 안 넘쳐.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 내 잔이야.

종성은 무안한 듯 입술을 내밀며 물러나, 왼팔을 뻗어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냈다. 동작이 참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이름부터 꼭 오는 사람 다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며 들어올 것 같은 녀석은 욕심이 큰 건 아니지만 길도 잘 잃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사서를 꿈꾸었고, 무리 없이 이루었다. 방황이 어찌 없었겠냐만, 닿아 있던 오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가 동요하는 걸 보지 못했다. 새내기 때 만난 여자와 내내 사귀었고, 내년에 결혼한다. 종성이 의외였던 적은 딱 한 번, 이제는 아내가 될 그 여자에게 고백하려고 부산에서 막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왔다가 여자가 통금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내 집에서 잔 날이다. 밤새 통화하는 녀석 때문에 난 한숨도 못 잤다.

담배를 사러 나가는데 집앞에 눈이 내려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었다. 쌀 씻는 그릇에 밀가루를 담듯 소매를 털었다.

왜 하필 삿포로일까? '전국에 눈 예보가 내리는 곳.' 설아와 한 약속을 종성은 알고 있는 걸까. 지난여름 삿포로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들통난 걸까.

- 붕어빵 먹자.

앞서 걷던 종성이 팔을 뻗어 도로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0.5톤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켜 둔 전조등 앞으로 눈발이 하강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모든 눈은 아래로만 떨어진다. 크게 부는 바람 안에는 수만 수십만의 소용돌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낙엽이 제자리를 맴돌거나, 돌고래처럼 곡선을 그리는 눈을 볼 때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이현우,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설아야,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위스에서 요양을 해도 모자랄 마당에 친구들을 속이고 건강한 척 산다.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야심한 밤에 이집트에서 돌아온 친구와 술을 마신다. 물론 그가 숙박비 대신으로 사온 것이다. 안면마비가 시작돼도 상관없다. 섬망이 심해져도 괜찮다. 이 잔잔한 일상을 포기할 수 없다. 병이 깊어질수록 내 한 마디가 그에게, 혹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동요를 일으킬지 알게 된다. 종성은 내가 계속 림프선을 주무르는 걸 모른다. 영영 모를 것이다.

- '커피와 담배' 봤어?

기계에 담배를 꽂으며 종성이 말했다. 난 팥맛 붕어빵의 눈알을 베어물며 고개를 저었다.

- 'Only lovers left alive,' 이건 알지.

- 비문이야.

- 설명문이야, 명령문 아니고.

- 나 국문과 부전공인데.

- 나 사서야.

둘 다 틀렸을지언정 찾아본다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영어이고, 우리네 농담이 대개 이런 식이다. 종성이 아직 글을 쓰냐고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읽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난 세상에 없을 것이므로 아무도 진의를 모르리라. 한동안 그들은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결국 이해하고 용서할 것이다. 날 행복하게 보냈다는 사실에 결국하여 안도할 것이다. 삶은 행복을 향한다. 행복은 이해와 용서를 바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위안이 된다. 내가 종성과 함께한 시간이 너를 생각한 시간과 같아서 그에게 더 애착이 간다. 슬픔에 잠시 휴식을 청하며, 우린 밤을 새운다. 언젠가 그리워질 순간을, 언젠가는 불가능한 일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한다. 적어도 종성은 이 추억으로 한 세월 나긋하니 살아가리라.



어렵고 험한 길을 걸어도

신해철,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설아야,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나를 용서해야 한다. 내 남은 삶에 너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며, 내게 용서하기를 바라는 것들을 알아서 용서하도록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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