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낮, 미현이가 오랜만에 화실에 들렀다. 일산에 사는 미현이는 나처럼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동네에서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내가 다니는 대학로로 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마다 왔는데, 주말에도 일하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한동안 뜸했다. 거의 두 달 만에 만난 우리는 그림을 그린 후 카페로 걸어가면서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미현이는 몇 달 동안 전화영어를 했는데 얼마 전 선생이 바뀌어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선생이 미국 사람이거든. 직업은 따로 있고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전화 영어 강사를 했는데 다른 일이 생겨서 시간이 없을 거라는 거야. 더 이상 통화 못 할 거라고 하더라고. 그게 이상하게 되게 서운하더라.” 미현은 허탈한 웃음을 머금더니 그와 마지막 수업을 한 날 울었다고 했다. “아니 진짜 웃긴 게 왜 눈물이 나냐는 거야. 얼굴 본 적도 없는데.” 나는 미현의 마음에 공감이 갔다. “그렇지, 누가 보면 연애한 줄 알 거야. 이게 다 우리가 너무 연애를 안 해서 그래”라며 진단까지 내렸다. 미현은 “그런 걸까?”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쩜 시기도 미현이와 절묘하게 비슷했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운동을, 그것도 헬스장 개인 트레이너(PT)와 1:1 강습을 했다. 건강검진 결과 몸무게가 역대급 숫자로 나왔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원래 살찌는 체질이 아니라 평생 다이어트를 해 본 적 없다. 서서히 찌는 편인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옷 살 때 ‘왜 요즘 옷은 작게 나오는 거야?’라고 불평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살찐 거였다. 평생 살찌지 않을 줄 알았기에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이었다. 위기감을 느끼고 헬스장에 갔다. 처음에는 직장 후배 윤지와 2:1 강습을 받았는데 윤지는 중간에 그만뒀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운동을 시작했다. 헬스장이 문을 닫아야 하던 때, 약 한 달쯤 쉬었는데 윤지는 그간 홈트를 했더니 효과가 나타난다며, 남아있는 횟수가 끝나면 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같이 그만둘까 했는데 운동에 좀 재미가 붙던 때였다. 게다가 트레이너가 2:1보다 1:1을 하면 더 집중도 높게 내게 맞는 운동을 가르쳐줄 수 있고, 두 사람이 할 때보다 운동시간도 늘어나는 셈이니 효과도 더 잘 나타날 거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서비스 횟수를 더 준다고 했다. 그러면 1회당 단가가 떨어지게 되어 이득 아니겠냐는 말에 혹하여 계속 다녔다.
처음엔 저질 체력이라 금방 지쳤고 자세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해 재미없었다. 엉덩이에 힘을 주라고 하는데 어떻게 주는지 모르겠고, 배에 힘을 주라고 하면 숨을 참았다. 그래야 힘이 들어가니까. 등 근육 운동에 좋다는 ‘랫풀다운’은 왼쪽 어깨가 ‘회전근개염증’으로 아팠기 때문에 힘을 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트레이너가 가르치기 참 힘든 회원이었다. 뭐만 하면 ‘무릎 아프다, 손목 아프다, 어깨 아프다’ 했으니 곤란했을 거다. 그런데도 나를 담당했던 트레이너는 싫은 내색을 하거나 타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손목 보호대를 채워주며 운동을 시켰고 어깨와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동작을 알려줬다. 매번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물어보고 근력 키우는 식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얘기를 해주며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내 생애 첫 트레이너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운동할 때 근육의 움직임, 자세 교정 등을 위해 트레이너가 몸을 살짝 잡아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게 정말 거북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만지니 거부감이 들었지만 사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란 걸 아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터치’가 익숙해지고 ‘잠은 잘 잤는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혼자서 어떤 운동을 했는지’ 등등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해졌다. 코로나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 2-3회를 만나며 시시콜콜한 일상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트레이너였다. 회사 사람과는 일 얘기 위주로 하고, 같이 사는 부모님과는 얼굴 마주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사적인 대화를 가장 모르는 사람과 하는 셈이었다. 그 트레이너에게는 영업활동의 일환이었을 텐데, 회원인 나는 뭔가 사적 친밀감이 쌓인다고 여겼다.
그런 마음 덕분에 점점 더 운동하러 가는 길이 즐거웠다. 그래서 해당 트레이너가 다른 지점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꽤 서운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요? 어느 지점으로 가요?”라고 물어봤다. 목동 지점으로 간다고 하여 포기했다. 아마 가까운 거리였으면 그 트레이너를 따라 지점을 옮겼을 것이다. 괜히 정들어 못내 아쉬웠다. 운동에 취미 붙일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기도 했다. 헤어지기 섭섭한 마음에 2:1로 운동을 같이 시작했던 윤지에게 부탁하여 트레이너와 셋이 점심을 먹었다. 둘만 먹으면 트레이너도 나도 어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치 횟집에서 거한 점심을 샀다. 돌아보면, 그 첫 번째 트레이너는 점심까지 사주는 나 같은 회원이 좀 특이했을 것 같다. 아마 내가 좋아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도 잠깐 헷갈렸다. 그 트레이너를 좋아했나? 운동 갈 때 좀 설레는 마음이 있던 건 맞다. 운동시간이 재밌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두 번째 트레이너를 만나고 확실히 알았다. 왜냐면 그 설레는 감정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두 번째 트레이너는 키 크고 잘생겼다. 운동도 잘 가르쳤다. 동작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줬다. 그때 살이 제일 많이 빠졌다. 트레이너의 굉장히 사적인 질문은 굉장히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란 걸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때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트레이너와 거의 매일 만나 뭘 먹고 언제 자고 맛있는 음식이 뭔지 등 무척 사소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고등학생 때 선생님을 좋아하던 그런 마음이었다. 그 두 번째 트레이너는 9개월쯤 지났을 때, 코로나가 조금 풀렸을 때, 여자친구와 유럽 여행을 간다며 관두었다. 의문의 1패를 당했지만, 헤어지는 날 그간 고마웠다고 산뜻하게 인사하며 끝냈다. 점심을 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후 트레이너가 다섯 번 정도 바뀌었다. 이제는 헤어지는 일에 익숙해져서 깔끔하게 인사한다. 내가 PT를 몇 년간 계속하는 걸 안 첫 직장 동기 은정이는 “뭔가 있지?”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의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도 처음 운동 시작할 때 마음이 살랑거렸다고 했다. 유부녀들이 트레이너와 바람 많이 나는 이유가 있다면서. 나는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왜 그런지 알겠어. 근데 내게 그런 끼와 용기가 있다면 진작에 연애를 수십 번 했을 거야”라고 했다. 은정이는 그 말에 바로 수긍했다.
트레이너에게 느꼈던 감정을 미현에게 설명했더니 “우리 왜 이러냐?”라며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나도 그런 거 같아. 그게 프리토킹이었거든. 주제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화하는데 일상을 얘기하게 되잖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친밀감을 느꼈나 봐.”라고 씁쓸해했다.
우린 각자 혼자인 삶을 즐기는 편이고 평소 고독하고 외롭다고 느끼지 않지만 이런 부작용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에 좀 놀라고 슬펐다. 매우 하찮고 별일 아닌 얘기를 나누는 사이면서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느끼는 사람, 때때로 그런 상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