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남자일 거라고 여겼던 사람과 끝내 헤어졌다. 한 달, 두 달 연락하지 않다가 다시 만나고는 했기에 첫 한, 두 달은 실감 나지 않았다. 그 후 그를 찾아갔다가 일언지하 다시 만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완전하게 이별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끝났을 때 끝난 걸 모르고 질척거린 자신이 창피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혹시 연락이 올지도 몰라’하며 기다렸다. 미련 맞았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의 소식이 너무 궁금해 ‘숨김’으로 돌려놓았던 그의 카톡 계정을 봤다. 프로필 사진에 떡하니 결혼식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 사진을 키워서 얼굴을 확인했다. 그가 맞는지 사진을 두 번, 세 번 키워봐도 그가 맞았다. 배신감이 크게 밀려왔다. 나와 헤어진 후 결혼했으니 배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전에 없던 사진이다. 겨우 몇 개월 사이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결혼할 마음 없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 일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시간을 역순으로 계산하며 그가 양다리를 걸쳤나 하는 의문이 생기고 나를 다른 여자와 계속 비교했나 싶었다. 그 저울질에 졌다는 결론에 이르면 한없이 우울하고 스스로가 참 못난 여자로 여겨졌다. ‘카톡 계정에 사진을 잘 올리지 않던 사람인데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면 올렸을까? 부모님 인사드리자고 할 때 미적대더니 이 여자는 안 그랬구나!’ 등 온갖 부질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어떤 날은 그의 집에 다짜고짜 찾아가 분탕질을 하고 싶었고 또 다른 날은 흥신소 같은 곳에 의뢰해 그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드라마에서 외도한 남편에게 복수하는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건 뭔가 싶어 옛일을 돌아보고 되뇌며 후회하기도 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회사 일에 통 집중할 수 없었고 툭하면 눈물 나는 날이 이어졌다. 먹을 게 넘어가지 않아 저절로 살이 빠졌다. 그 무렵 혼자 살 때여서 다행이었다. 못난 모습을 부모님께 보이지 않아서. 그와 헤어졌다고 했을 때 엄마가 무척 상심하셨더랬다. 딸이 드디어 결혼할 줄 알았던 엄마는 내 눈치를 보며 아쉬워하셨다. 부모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표정까지 감추기는 어려웠다. 회사 일로 항상 바빴던 나는 ‘회사 일’을 핑계로 부모님 집에 자주 가지 않았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마음이 더 피폐해지고 이성을 잃을 것 같아 심리 상담소를 찾았다. 처음 한 달은 울기만 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게 상담사 질문 한마디에 눈물이 흘렀다. 심리상담사는 분노와 자책 사이에서 횡설수설하는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자책할 일이 아니라고 설명해 줬지만,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던 내가 그걸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회복하는데 대략 10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심리상담을 하는 기간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책, 사랑이란 감정을 분석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중 내 마음 상태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이 있었는데, 김혜남의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책에 나온 문장이었다. “실연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고통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자신의 깊은 내면을 상대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자기 가치감이 낮은 사람들의 경우는 심한 자기 비하로 나타난다. 즉,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던 그 누군가가 자신이 천박하고 추하며 분노로 꽉 차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에 떠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랬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의 원초적인 모습을 본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느라 말하지 못했던 치졸하고 편협한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던 상대, 밑바닥 감정을 보여줬던 사람, 감춰져 있던 욕망, 두려움을 일깨워주고 수많은 감정의 실체를 체험하게 했던 사람이 내가 싫어 돌아섰나 싶어 자존감이 해지고 너덜거렸다. 자기 비하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상담받던 초반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나만 빼놓고 수군대는 것 같았다. 상처받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 무렵 회사 절친인 다희와도 삐거덕해 서먹서먹했다. 다희는 열 살 어린 후배지만 말이 잘 통해 친해졌고, 여행을 자주 다닌 사이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때에 다희는 연애를 시작했고, 짧은 연애 끝에 결혼했다. 내게 청첩장을 주던 날 미안하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힘든데 자기는 결혼해서 행복하니 미안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때 내 상태가 최악이었다면 아마 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를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질투나 하고 시기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후배를 오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희의 미안하다는 말 그 자체 그대로 받았다. 꼬인 마음으로 그 말 한마디를 확대해석하여 속상해하지 않았다. 결혼하는 모습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후배가 평생의 반려를 만난 그 사실만을 축하하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내 감정을 이입해 비교하지 않았다.
심리상담으로 알게 된 것은 평소에도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내가 부족해서, 내 탓이야’라고 자주 했고 나를 감추는데 능했다는 걸 깨달았다. 벨 훅스는 ‘사랑은 사치일까?’(원제 communion, 연대)에서 우리는 ‘감정적으로 궁핍한 존재’이기에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 다른 상대를 구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필요 이상으로 길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너무도 적절히 잘 표현한 말이었다. 거의 모태솔로에 가까웠던 나는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런 내게 그가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때, 그 자체로 이미 난 내 가치관, 취향 등을 감추고 그에게 맞추려고 했었음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마흔 중반에 만난 사람이기에 앞으로 남자를 만나기 희박하다는 절박함, 누가 나를 좋다고 하겠는가 하는 두려움으로 아닌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끊어내지 못했다. 그와 데이트하며 술집을 많이 다녔다.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했기에 늘 불편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더구나 소주는 한 잔만 마셔도 머리 아프고 알코올 맛이 나서 선호하지 않았는데 그는 유독 소주를 마셨다. 그때는 어이없게도 내가 와인을 좋아하고 게다가 달콤한 로제(Rose) 보다 당도 낮은 샤르도네(Chardonnay)를 좋아한다는 취향을 잊고 살았다. 그 앞에서 와인 종류는 물론이고 와인을 좋아하는 티도 내지 않았다. 어느 날 출장지에서 동료들과 좋아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에야 확 되살아났다. 내가 술을 못 마셔도 와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비록 그가 손을 놓을 때까지 미련 맞은 시간을 보냈고 그로 인해 더 아팠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그렇게라도 끈이 끊어져 다행이었다. 만일 그의 반려자가 되었더라도 결국 난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역시 진리는 불변임을 체감했다. 세월이 약이었다. 7, 8개월쯤 지나자 눈물이 멈췄고 좀 객관적으로 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른 사람이었음을, 다른 욕구를 가지고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배신당했다는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탓이 아니란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심리상담사 도움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나서야 자존감 강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당당했다. 좀 과하게 살쪄서 뚱뚱한 외모가 콤플렉스일 것이라 짐작했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예쁜 옷을 뽐내며 잘 입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움츠리는 모습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당해서 빛났다. 내가 손꼽는 자존감 강한 사람 1위다. 주변이 어떻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 내가 가진 가치관대로 밀고 나가는 힘, 몸통 코어에 힘을 주듯 딱 중심을 잡는 일. 그게 자존감 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실연으로 죽을 것 같았지만 나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 있었다. 연애한 덕분에 희로애락의 보편적 감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비록 실패한 사랑이라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으로 더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가수 구창모의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가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