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인턴으로 다니던 날들과 계약직으로 출근의 시간은 분명 달랐다. 월급통장에서부터 금융치료의 퀄리티가 달라졌고, 나를 보는 직원들의 시선도 달랐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물론, 그 누구의 변화가 직접적으로 느껴진 건 아니다) 지금까지는 말 그대로 인턴의 모습으로 회사의 일원보다는 일을 배우러 온 사람을 대하는 분위기였다면, 계약직이 된 나를 대하는 태도는 한 집단안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해도 좋다. 이 모든 일이 재미있고, 할만했고, 더 배우고 싶고, 사람들조차도 너무 좋았다.
생각보다 나는 일머리가 나쁘진 않은 듯했다. 하나의 일을 배우고 나면 바로 다음 한 개의 일을 더 얹어서 해결해야 했다. 무언가 시작하면 끝까지 마무리를 짓고 싶은 내 성격이 일을 하는데 많이 효율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열심히 회사에 적응하고 일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손수 전달하던 전략기획팀과 영업전략팀 사이의 문서이다. 대부분 사내 메일 또는 사내 메신저로 많은 자료가 오간다. 간혹 열람이 잠겨져 있는 게시물도 많다. 디지털시대에 많은 자료들을 온라인상에서 공유하고 변경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 중에 꼭 이 두 팀사이에 보이는 꼭 수기로 전달해야 하는 문서. 늘 누런 봉투에 봉인마저 되어있어서 정말 중요한 내용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내가 하고 있는 일중에 도통 알 수 없는 내용이 전달되는 이 봉투 안이 너무 궁금해졌다. 더욱이 내 궁금증을 유발했던 건 나에게 직접적인 업무 분장을 맡기지 않았던 전략기획팀장님은 이 전달내용만큼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전달하셨다. 마냥 순수한 마음으로 임했던 이 업무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궁금해지긴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문서를 전달하고 오는데 카톡 알림이 울렸다.
-SOS 오늘 우리 점심 함께 해요~ 저 숨 쉴 구멍이 필요해요!
회계팀으로 발령을 받은 인턴 동기의 메시지였다. 시간 되는 사람들과 함께 오늘은 점심을 잠깐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특별한 이야기 없이도 그냥 함께 편안하게 밥 먹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만족하는 시간이었다.
“근데 다들 이야기 들었어요? 지금 자꾸 사내 자료 빼돌려서 지금 여기저기 부서에 몰래 조사 들어간다던데~ “
“맞아. 일단 저번에 사내 게시판 잠시 서버다운 되었던 것도, 회사에서 갑자기 막아놓고 메일이랑 다 싹 살펴본 거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내 업무에 대한 비밀이 바로 이거였던가, 전략기획팀장과 영업전략팀의 자료공유는 곧 외부유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모든 사고가 마비가 되었다.
“종이씨, 지금 표정은 종이씨가 회사 정보 유출한 사람인 것 같아~ 전략기획팀에 무슨 일 있어? 그쪽은 회사에서 아주 총애를 받는 팀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던데~.”
“아~ 아니에요~ 저 다른 생각하다가 갑자기 오늘까지 해야 하는 안 한 업무가 생각났어요~ 우와… 저 자료유출 이야기 하다가 제 업무가 생각이 났어요! 자료 유출보다 저에겐 더 심각한 일이네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너무 당황했지만, 무언가 확실해질 때까지 정확한 상황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영업전략팀식구들을 만났다.
“어 황대리님~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종이씨~ 우리 회의가 지금 끝났어요~ 벌써 밥 먹고 오는 거예요? 들어가세요~”
영업전략팀에 마지막으로 오전에 서류를 전달하고 난 전략기획팀으로 돌아와서 간단한 업무를 보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영업전략팀에서는 그 이후로 회의가 길어졌던가 보다. 뒤숭숭한 마음을 가지고 전략기획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만약 내가 상상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확인이 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다. 고발 이런 걸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서류들을 전달한 업무를 한 나도 공범이 되는 건지, 그 짧은 시간에도 많은 상상들이 펼쳐졌다. 잠시 마음을 정리해 보려 7층 전략기획팀에 도착하기 전 6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6층은 처음 가보는 곳 같았는데, 어떤 부서인지 알 수 없는 이 사무실의 분위기는 다소 조용하다 못해 으스스함까지 느껴지게 했다. 나의 목적지는 7층이고 이 으스스함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나는 비상구의 손잡이를 돌렸다. 아직 봄볕은 실내온도를 높일 만큼 강하지 않았고, 비상구의 손잡이는 아직 겨울을 못 벗어난 것 마냥 차가웠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을 보았다. 분명 내가 아는 두 사람인 듯해 보였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두 사람, 전략기획팀장과 영업전략팀장이었다. 그 둘은 그 어떤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듯 굉장히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의심했던 그런 장르가 아니었다. 사내자료유출이란 단어를 덮고 주변의 모든 온도를 다 가져간 듯한 두 남녀의 밀착된 거리는 어릴 때 처음 접한 러브신을 보던 기분을 자아내듯 풀장 착한 옷이 마치 다 벗겨져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난 본능적으로 빠르게 문을 닫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사내커플이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전략기획팀장은 버젓이 회사책상에 가족사진도 올려져 있었다. 그 사진 속의 부인은 영업전략팀장은 아니었다. 그럼 말로만 듣던 사내불륜을 목격하게 된 걸까?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내 신상 탓에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막상 바로 가까운 좋은 감정의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불편함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날 오후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나에게 들킨 걸 아는 건지 유독 조용했던 그날 오후의 업무를 끝내고 난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분명 그 둘은 무언가 서류를 전달하고 있고 나는 그 서류를 전달하는 업무를 많이 해왔고 하고 있다. 난 그게 회사 중요문서 유출이 아닌가 상상했고, 그 추측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내로남불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 둘은 그 순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보는 그냥 사회적인 시선으로는 불쾌감마저 들게 하는, 감정을 쓸데없이 발산하는 덜 자란 어른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로남불이 사자성어인 줄 알았던 내 어릴 때가 생각이 나서 픽 하고 웃었다. 심각할 필요 없다. 각자의 인생대로 그 어떤 이유가 있겠지 하고 결론을 지었다.
오랜만에 서둘러 집에 와서 엄마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엄마, 엄마는 아빠가 첫사랑이었다고 했잖아~ 그 이전엔 정말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 둘이 만나면서 바람을 피워본 적도 없어?”
나는 뜬금없이 엄마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물었다.
“어머, 오랜만에 아빠 소환하는 거야? 하하하 그렇지~ 엄마랑 아빠는 절친이었고~ 우린 의리로 먼저 맺어진 관계였기 때문에 그럼 서로 큰일 난다고 생각했지~. 왜 주변에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니? 혹시 회사 사람들이야?”
역시 엄마의 촉은 아직 살아있다.
“아니, 뜬소문들이 많더라고, 회사가 크니까 별별일이 다 있나 봐. 그 사람들은 그럼 의리가 없어서 바람을 피우는 걸까?”
난 말을 돌려 엄마에게 질문을 했다.
“글쎄, 이유 없는 무덤 없다고 하잖아, 그런 행동들이 옳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된 어떤 이유는 있을 것 같기도 해, 그런 이유가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인데, 세상엔 덜 인간다운 사람도 많지.. 우리 종이 회사 다니면서 그런 감정들도 생각해 보게 되는구나. 역시! 넓은 세상은 배울 것들이 많아! 우리 딸 기특하네.”
긍정적인 엄마의 말속에 양심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도리가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나를 혼자 키워야 했던 엄마는 늘 예의 바른 양심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는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거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엄마의 모든 잔소리에는 아빠의 부재가 묻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러한 생각들은 늘 내 삶에 깊이 박혀있었고, 그런 나의 잣대로는 오늘 내가 목격한 상황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느껴진 것 같다.
그래, 그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는 하되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내문서 유출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그 문서의 내용은 내가 알 수가 없으니 그것도 아직은 불안하다.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빼고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