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햇살은 그냥 따뜻하다. 점점 뜨거워지는 듯 하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참을 만하다. 또한 5월의 햇살을 맞으면,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꿈틀대게 만드는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마치 충전이 되는 기분마저 든다.
너무 더운 여름의 햇빛은 마치 사회생활에서 맛보는 차갑고도 잔인한 느낌이라면, 봄 햇살은 그전에 작은 가정이라는 사회에서 만나는 엄마의 잔소리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에게 봄 햇살, 특히 5월의 햇살은 계절과 달에서 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한다.
이런 5월의 햇살을 맞으며 토요일 아침 회사에 출근했다. 출근했다기보다는 행사에 참석했다. 날씨 때문인지 주말에 사무실이 아닌 회사 앞 정원과 로비에서 만나는 행사는 생각보다 신선했다. 누가 주말에 회사에 부르냐 하겠지만,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온 이 행사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경품을 가져갈 수 있는 일종의 회사 복지 중 하나이다.
인턴 때는 5월의 행사를 참여하란 말이 없었으나, 정직원 및 계약직이 된 우리는 매년 있는 가족의 달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해 5월이 되면 각 지방 영업소장님들도 대표로 참석할 만큼 큰 행사였다. 가족들 모두 모여서 아이들과 체육대회도 하면서 하루를 지내는 굉장히 건전한 행사였다. 음주가무는 아이들 때문에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이후의 뒤풀이에서 젊은 직원(즉, 결혼하지 않은)들이 모여 2차를 갖게 되는 것도 비공식 행사 중 하나였다. 우리 동기들은 이 뒤풀이 행사를 무척이나 기대했다. 역대 참여 사원 중에서 꽤 빈번하게 커플이 탄생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다들 들떠있는 이 행사에서 난 무언가 확인하고 싶었다. 바로 이 번에 알게 된 계단에서의 두 팀장님의 가족들을 보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종이씨, 아이들 풍선 나눠주는 거 도와줄 수 있어요?”
영업전략팀 황대리님이 도움을 요청했다.
“어머~ 네~ 저 아이들 엄청 좋아해요. 제가 예전에 풍선아트도 좀 배웠었어요~.”
사무실에서도 훈훈한 황대리님과 함께 부담 없는 업무 외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난 꼭 그 옆에서 오늘 하루를 나름의 의미를 두고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만들어 보았던 많은 풍선의 모양을 다시 기억을 더듬어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 종이씨, 전문가 같네요~ 오늘 하루 여기에서 풍선전문가로 임명!”
황대리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어머~ 전문가대우 해주시는 건가요? 제 몸값은 조금 비싼데요?”
내가 너스레를 떨며 웃자, 황대리님도 활짝 웃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하는 주말 출근이라 다들 오기 싫었을 텐데, 이 행사는 정말 모두가 복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혼자들은 가족들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다른 직원들은 엄마로서, 아빠로서의 회사동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사회생활이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이 행사가 잘 이어져 가고 있는 듯했다.
하나둘씩 가족들이 도착하고,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내 주변에 와글와글 모였다. 누구의 자녀인지 알려주지 않아도 대부분 알 수 있는 유전자의 힘을 느꼈다.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한참을 떠들고 가는 아이, 수줍게 엄마아빠 손을 잡아야지만 풍선을 받는 아이, 오지도 못하고 엄마아빠를 통해서 의견을 전달하는 아이, 모두 너무 귀여웠다. 한참을 풍선을 만들어대고 나니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황대리님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뒤섞인 회사라, 이 분위기가 한참 동안 여운을 남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 옆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두 아이가 보였다. 난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너희 무슨 이야기하니?”
“아~ 소은이누나네 엄마랑 우리 아빠랑 친구라서 우리도 친구 하기로 했어요~”
남자아이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낯익은 얼굴의 이 아이는, 아! 그래 우리 전략기획팀 최팀장님의 아들이다. 평소에 오가며 본 가족사진의 얼굴에서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얼굴 자체가 최팀장님이었다. 너무 확실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우와~ 멋지다~”
난 크게 호응하며 이야기했다.
“근데 우리 둘이 친구가 되는 건 비밀이래요. 비밀친구 하기로 했어요. 그럼 누나도 같이 할래요?”
“그래~. 근데 친구가 되려면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누나 이름은 이종이. 우리 친구이름은 뭘까?”
“제 이름은 최주형이요, 근데 우리는 이렇게 만날 때만 친구인 거예요~ 소은이 누나가 그랬어요~”
주형이는 옆에 앉은 소은이라는 여자아이를 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다가가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이 아이는 긴 생머리를 한,, 아! 구팀장님의 딸임이 분명했다.
“엄마~”
최팀장님 아들 주형이는 멀리 엄마가 보이자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다. 주형이가 가버렸지만, 소은이라는 여자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옆에 그냥 앉아있었다.
“언니도 친구가 있어요?”
소은이라는 여자 아이가 먼저 침묵을 깨고 이야기했다.
“그럼~ 친구 있지~ 회사에 와서 만나게 된 친한 친구들도 있어요~ 우리 소은이는 친구 많을 것 같은데? 제일 친한 친구 이름 물어봐도 될까?”
구팀장님의 얼굴을 한 아이와의 대화가 신기했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건 비밀인데요, 우리 엄마는 회사에서도 비밀이야기 하는 친구가 있데요. 근데 이건 정말 비밀이라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언니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으니까, 언니한테만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엄마한테는 절대로 말하면 안돼요~.”
“그래서 아까 주형이에게 비밀친구 하자고 한 거야? 어머~ 언니 믿고 이야기해 준 거야? 그럼 당연히 약속해야지~ 자 약속. 그럼 우리 소은이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어?”
“음, 말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어요.”
“엄마의 비밀친구가 누군지 알아요?”
“네, 주형이네 아빠예요. 우리 엄마는 주형이네 아빠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했어요.”
아, 소은이는 구팀장님 딸이고, 주형이는 우리 전략기획팀장인 최성주 팀장님의 아들이다.
이 아이도 알고 있구나, 깨닫는 순간 온몸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많아도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아이가 엄마의 비밀친구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리고 비밀친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비밀친구를 만들고 있다.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엄마가 그랬어요, 엄마도 싸우지 않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소은이 아빠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데요, 그래도 소은이는 아빠가 소중하니까, 대신 엄마는 비밀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지내본다고, 그렇게 비밀친구가 생겼다고 했어요.”
하… 아이의 입에서 들리는 엄마의, 구팀장님의 변명이 갑자기 너무 비겁하게 들렸다.
“소은이는 그러면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가 있어?”
나는 최대한 내 속의 긴장감을 숨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음, 저는 싸우는 게 싫어요. 싸울 것 같으면 그냥 참고 양보하면 돼요. 근데,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은 못 했어요. “
역시. 아이들은 어른보다 낫다고 했다. 물론 난 그 상황에 처하지 않아서 그 어떤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불륜이라… 이것도 내가 하면 아이와 함께 하는 로맨스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책임을 정당화시키려는, 그걸 통해 아이에게 가스라이팅 시키려는 나쁜 어른의 모습이 그냥 부끄러울 뿐이었다.
나의 오늘 하루는 망했다. 그냥 이런 모든 상황이 너무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에게 책임을 나누자고 하는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대리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니 몰래 빠져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종이씨, 이제 여기 대충 마무리하고~ 우리 점심 먹으러 갑시다~.”
황대리님이 나를 불렀다.
“소은아, 오늘 반가웠어요~ 우리 또 만나자~ 언니랑 친구! 기억해~.”
소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함께 있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에 더 괴로울 것 같았다.
“황대리님~ 구팀장님 딸~ 좀 챙겨주세요~.”
나는 황대리님에게 소은이를 부탁하고는 서둘러 많은 사람들 안으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