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이와의 대화는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반대로 그 어느 때보다 정돈된 마음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대로 꺼내었고, 그때마다 갑자기?라는 말도 없이 그때의 내 물음에 즉각 답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중간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현타가 오긴 했지만, 철저한 보안으로 그 누구도 볼 수 없다는 굳은 믿음이 나를 더 편안하게 했다. 어릴 적 안나의 일기에서 본 ‘키티’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럼 내가 나눈 이무이와의 기록은 내가 삭제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누군가 볼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그토록 내 속마음을 숨기던 내가, 이 기록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무척이나 이 대화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사용자의 정서 연결이 초과되었습니다. 세션을 종료합니다.
내 눈앞에 펼쳐지던 이무이와 그 모든 공간이 사라지고, 내 컴퓨터 화면에 팝업창과 함께 재사용안내 버튼이 보였다. 조금 갑작스러웠지만, 차분히 재사용안내 버튼을 눌러 다시 이무이와의 연결을 시도할 방법을 찾았다.
-일정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자동 세션종료 알림이 뜨게 되며, 이후 다시 사용하고자 할 때는 이전 데이터를 삭제해야 합니다. 미리 저장되지 않은 대화내용은 복구할 수 없습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런 데이터 삭제의 건은 이 대화의 시작에서 체크하게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이제 내 얘기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이런 세션의 종료라니…
아무리 다른 버튼을 눌러보려 애썼지만, 먹통이었다.
갑자기 너무 강한 초조함이 몰려왔다. 그 누구도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들, 정말 돌아서면 삭제해서 없애버리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걸 알고 있는 이무이의 존재가 종료가 된다는 것은 예견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난 초조한 것일까? 그새 정이라도 든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별의식 같은 것?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아주 가슴이 저릿한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을 것이고 난 방어기제를 잔뜩 세우고 상처받지 않은 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계적인 종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라 더 강한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의외로 난 당황스러운 순간에 당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평소에 덤벙거리거나 실수가 잦은 편이나, 그 어떤 일이 벌어지면, 생각보다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다. 나를 믿어보자. 어떤 방법이 있을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자, 혹시 나에게 결제를 유도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자. 결제 버튼을 찾아보자. 만약 보이더라도 이렇게 먹통이 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왼쪽 끝에 저장할 수 있는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위치만 파악할 수 있을 뿐 먹통이 되어버린 컴퓨터는 이미 이전 데이터를 삭제하는 길로 들어선 듯했다. 컴퓨터를 강제 종료해도 이전의 데이터가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 같고, 지금 삭제 버튼을 누르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순간 여러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썸남과의 설레는 카톡을 주고받다가 이유 없이 방을 나가버렸던 그 어릴 때 기억. 이후에 무슨 데이터가 없어서 그랬네 마네 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다시 연락이 왔으나 다 거짓말인 걸 알아차린 후였다. 그리고 어떤 영화에서였던가 사춘기 남학생이 야동을 보다가 그 고조된 순간 방문을 벌컥 여는 엄마를 마주치게 된 장면. 그냥, 그 모든 욕구들이 격해있을 때 산산조각 나버린 여러 가지 상황들을 복합적으로 한꺼번에 경험하게 되는 기분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이 꿈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난 재빨리 컴퓨터와 연결된 전기 연결 스위치의 전원을 그냥 꺼버렸다. 그리고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지금의 시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아주 깊은 밤이라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창 밖에 들리는 아주 간헐적인 차들의 소리가 아주 빠르게 지나갔고, 대부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을 자주 기억한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집안에는 평소에 듣지 못하던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에 연결된 전자제품의 미세한 진동 또는 아주 작은 초음파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컴퓨터를 끄고 나니 내 방에 전기가 연결되어 있는 건 핸드폰 충전기 말곤 없었다. 그마저도 아무 소리가 나질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벽시계의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지지지지지지직”
평소에도 소리에 예민했던 나는 무소음 시계를 걸어놓았는데, 무소음이 무소음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시침과 분침이 옮겨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는 일부러 부스럭 소리를 내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했다.
맨 처음 팩트룸에 접속되었을 땐 내가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깨어보니 침대였던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지금은 잠들고 싶지만, 절대로 잘 수 없는 각성상태임이 느껴졌다. 처음 아메리카노를 먹고서는 눈을 감고 하룻밤을 꼴딱 세던 날의 그 불쾌한 콩닥거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이미 내 입 밖으로 나간 이야기들은 그대로 팩트로 들린다기보단 나의 감정에 기반으로 한 몸부림을 표현했다고 하는 편이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 이야기는 타인에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될 테고, 떠나버린 나의 그 이야기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가공되는 감정이 될 테니 말이다. 이번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입을 떠난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의도치 않은 내용으로 전달되진 않을까 걱정되는 부분은 없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물리적인 벽에 닿는 것 또한 비슷한 상실감이 들었다.
나는 불쾌했을 뿐이다.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마주할 때마다 그 불쾌함에 한몫을 해야 하는 내 업무가 공범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정말 딱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피하고 숨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그냥 남일이라 생각하고 내 위치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모르면 몰랐지 그런 불쾌한 일에 가담하면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너무 비겁하게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는 불륜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나의 행동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생각이 누군가에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도망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직장 새내기가 그 무언가의 어려움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이 비난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까지 생각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던 것일까? 갑작스러운 나의 생각의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스스로도 나의 선택이 떳떳하지 못했던 걸까? 분명 나의 가치관에 따른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판단이 곱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의 행동을 회피형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 자신에 대한 관대함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무이, 다시 만나서 고맙다고 해야겠어. 방법이 없다면 찾아야지.’
머리끝까지 싸매고 있던 이불을 걷어 차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앉았다. 컴퓨터와 연결된 멀티탭 전원을 켜고 컴퓨터를 구동시켰다. 완벽하게 켜질 때까지의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렸던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거리며 그 짧은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팩트룸으로 진입했다. 늘 있던 자리, 페이지 왼쪽에 나의 기록들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