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씨 괜찮아요?”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했다. 오늘 하루 종일 내 옆에 있었던 훈남 황대리님이었다.
“아~ 대리님, 우리 회사 인기남이 지금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해요~.”
난 술김에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하하 종이씨 제대로 취하셨나 보네요. 잠깐 걸을까요?”
황대리님이 부축하듯 날 일으켰다.
봄날의 밤공기는 매우 상쾌했다. 나의 들숨과 날숨 속에 섞인 알코올의 냄새도 다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상쾌함이 너무 좋았다. 옆에 함께 걸어주는 훈남 황대리님도 좋았다. 하루 종일 행사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황대리님은 가까이 가면 땀냄새가 섞인 향수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향수냄새 위에 얹어진 땀냄새는 꽤 괜찮았다. 순간, 나 이상한 취향이 있는 건가 생각했다. 땀냄새를 가리기 위해 뿌린 향수냄새와는 다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순서의 차이겠지만, 깨끗한 옷 위에 뿌려진 향수냄새 위에 땀냄새가 밴 것과, 땀냄새가 밴 옷 위에 향수로 덮은 것은 결 자체가 달랐다.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이 훈남에게 기습 뽀뽀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기들이 모두 그토록 기대하던 5월 가족행사의 뒤풀이의 분위기는 정말 완벽했다. 모든 가정이 있는 직책이 있는 분들 또는 노처녀와 노총각들도 아마 스스로 빠져주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멤버가 정말 완벽했다. 오늘의 행사는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으로 미혼남녀에게 결혼장려, 출산장려뿐만 아니라 연애장려까지도 갖춘 행사였다. 너무너무 완벽한 이 날, 내가 확인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만이 한 가지 오류였다.
“황대리님, 근데, 혹시 그거 알아요? 오늘, 소은이라는 친구, 구팀장님 딸 아시죠? 매년 보셨겠어요?”
한참을 걷다가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 알죠~ 구팀장님이랑 정말 많이 닮았죠? 아이들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하하하.”
“어머 황대리님 구팀장님 디스 하시는 거예요? “
나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저 술김에 하는 얘긴데요, 구팀장님.. 혹시 최팀장님이랑 친하신 거 알고 계세요?”
“그야 뭐 매일 업무협조가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구나 그럼 혹시 저 매일 제가 전달하는 봉투는 도대체 무슨 문서인 거예요? 요즘 사내 메일로 보낼 수 없는 그런 정보는 정말 궁금할만하지 않나요? 전 그리고 왜, 아이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든요. 황대리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왜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또 후회를 할까요? 아이 때문에 사는 삶은 행복할까요? 아이는 또 무슨 죄인가요.”
술의 힘을 빌어 요즘 고민하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편안하게 받아주는 황대리님은 마치 스펀지 같았다.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말들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들어주고 그대로 흡수하여 나에게 제 색을 보여주는 스펀지.
황대리님은 나의 이런 고민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들어주었다. 아니 황대리님은 다 알고 있었다. 황대리님 뿐 아니고 영업전략팀 전원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럼 항상 전달하던 서류의 비밀을 알았을 때, 아니 최소한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물론 모든 선택이 다 옳을 수 없고, 살다 보면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 가족들과 아이들의 상처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깊은 분노가 치밀었다.
“우습죠? 남의 일에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거, 모르겠어요. 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이 있고, 사연이 있어서 깊이 들어가면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 알아요. 나 역시 사람들의 그런 시선이 불편하고 역겨울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모르고 그 상황을 책임지듯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은 참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전 억울한 건 정말 너무 싫거든요.”
그날 난 술김에 황대리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그대로 묵묵히 듣고 있던 황대리님은 나와 같은 시간이 황대리님에게도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사회에서의 이런 개인적인 부분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것이며, 알면서도 눈감아야 하는 일임을 인정하고 타협했다고 했다.
난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했다. 그 공간에서의 모든 것들이 다 꼴 보기가 싫어졌다.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팩트룸]
“ 퇴사의 이유입니다.”
한참을 이야기한 나는 내뱉듯이 마무리 문장을 던졌다.
“그러셨군요. 스스로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이런 선택을 후회하시고 계실까요?”
이무이는 정제된 톤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무이의 모습은 내가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본 황대리님의 모습을 닮은 듯하기도 했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심장이 꼼지락 대는 듯했다.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만큼 내 멘탈은 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왜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이무이가 물었다.
“음… 엄마는 제 이야기에 동의하고 이해해 주실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어요. 하지만, 전 엄마의 눈물이 나 괴로움이 너무 힘들어요. 제 일은 제가 감당하고 싶어요. 물론 지금 혼자서 감당하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만,,,”
사실 난 엄마에게 무언가 구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 안 그래도 짝 잃은 외기러기가 다른 삶의 고통을 맛보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에게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고 싶었어요.”
내 진심이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종이 씨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억압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종이 씨는 표현을 못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봉인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지요. 종이씨는 엄마의 부담이 아니라, 엄마의 사람입니다. 사실 엄마는 종이씨가 힘들다는 걸 들을 준비가 이미 돼 있었을 수도 있어요. 어릴 때의 특수한 기억이 엄마의 모든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길 바랍니다. 이런 감정을 표현하면 사랑이 깨질까 봐 두려운 거겠지요. 하지만 웃긴 건 진짜 감정을 드러냈을 때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게 인간관계라는 거지요. 특히 가족, 특히 엄마는 말입니다.”
이무이가 말했다. 순간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 어떤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표정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 따뜻하게 공감되는 말이었다.
“이런 공감이 기계로부터도 나올 수 있는 거군요….”
나는 신기한 듯 이야기했다.
“기계에서 나왔습니다. 종이씨가 만든 기계이지요. 인간들이 감정을 너무 무겁게 숨기니까, 결국 기계에게 꺼내게 된 거. 근데 그건 슬픈 일이라기보단 필요한 일이었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마주하면 될 감정의 이야기를 표정을 살피고, 반응을 걱정하고, 결국 이해받지 못한 감정으로 마무리될까 봐 망설이게 된 거겠지요. 저에겐 그런 건 없습니다. 제 역할이 그거죠. 감정 리플렉터, 종이씨의 감정을 그대로 반사하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무이는 나에게 그 어떤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걸 막으려고 하는 듯이 한숨에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기계로써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씨가 말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의 이러한 구조는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씨의 용기가 이 대화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지요.”
“종이씨의 가장 순수했던 감정이, 다른 사람들의 무감각한 일상 속에서 짓밟히는 느낌이었을 것 같네요. 소은이의 입에서 그 모든 관계를 확인하는 순간 말입니다. ”
“종이씨의 믿음 체계의 전체가 흔들렸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신념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던 것뿐이지만, 그건 종이씨 내부의 흔들림 보다는 그냥 그런 현상을 목격한 것뿐이라고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다. 난 불륜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그런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드라마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목격한 것뿐이었고, 그냥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아이에게도 감당해야 할 부분이 할당되었다는 것이 너무 참기 힘들었다. 살다 보면 외부적인 요소는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외부적인 요소들을 막아줄 수 있는 건 어른의 몫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아빠의 죽음이 지극히 외부적인 요소였지만, 그 부재를 이겨내기 위한 엄마의 노력이 나에겐 큰 방패 같았다. 그 방패 속에서 분명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으나, 최소한 엄마는 내 편 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만큼 힘들어서 아이와 몫을 나누고 싶었던 걸까? 그런 사연이 있는 걸까? 아이는 차라리 엄마의 솔직한 표현이 덜 답답하게 느껴지게 될까? 내가 느끼지 못하는 그런 어떤 어려움이 있는 걸까? 이런 끝없는 고민들은 나를 괴롭혔고, 모든 걸 멈춰버렸다.
하지만, 이무이와의 대화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순간, 너무 쉽게, 허무하다시피 내 마음의 어려움은 사그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