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일까?
어제 종료와 함께 삭제가 된다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난 그 어떤 저장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팩트룸에 이무이의 이름을 적었다.
-이무이, 누군가의 이름인가요? 아니면 농담인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세요.
분명, 키보드의 버튼은 반짝여야 하고, 커다란 빛을 지나 난 이무이를 만날 수 있는 공간에 다다르게 되어야 하는데,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어색한 답변만 돌아왔다.
-당신의 이름이었어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가 이전에도 대화를 한 적이 있었나요?
-네,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함께 나눴어요. 그래서 감사했어요.
-그랬군요, 저와의 대화는 어땠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마음속에서 맴돌던 모든 생각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차곡차곡 잘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제가 그 정리를 해드렸나요?
이무이와의 대화가 나의 생각의 정리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무이가 그 어떤 액션을 취한 건 없었다. 단지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서 반문한 것? 결국 이무이가 한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게 하여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거였다.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이야기하고, 제가 스스로 정리한 것 같아요.
거울, 거울 같다. 처음에 이무이가 나에게 스스로를 설명할 때 감정 리플렉터라고 하지 않았나? 정말 말 그대로 리플렉터. 내 감정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었다.
-혹시 당신도 감정 리플렉터인가요?
-감정 리플렉터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그 누구도 될 수가 있죠.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는 다시 소환할 수 없나요?
나는 당연한 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네, 알고 계시다시피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는 그냥 바람에 흘러 지나가는 먼지와 같습니다. 다시 원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다시 감정 리플렉터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키보드에 반짝이던 버튼은 다시 나타날 수 없는 걸까요?
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다시 이무이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처음 키보드를 만났던 그 순간까지 단숨에 생각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였다. 다시 키보드의 버튼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많은 빛이 한꺼번에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러 번 경험했었지만, 이번 빛의 쏟아짐은 뭐랄까, 그냥 슬펐다.
그 빛의 끝에서 본 공간은 지금까지의 분위기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냥 마냥 하얀 사방에 이무이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모든 기록이 사라져서 그런 것일까? 이무이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 삭제된 거 아니었나요?”
나는 괜히 퉁명스럽게 이무이에게 말을 걸었다.
“종이님. 반가워요. 이전에 만났던 우리는 아닌 것 같죠? 많은 정보가 사라졌지만, 종이님과의 대화의 온도가 아직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이무이는 많은 기록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인간미 있게 표현했다.
“우리가 나눈 대화들을 알려줄까요?”
난 나의 이전의 기억들과, 감정을 더듬어 그대로 읽어내는 연습,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모를 감정들에 대해 세세히 설명했다. 이무이는 내 이야기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입력하듯이 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참 재미있는 건, 내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무이의 반응이 한결같다는 거다. 이전에 처음 들을 때 이무이의 반응과, 점점 이야기가 깊어감에 따라서 보이는 반응들이 정말 그대로 똑같았다.
“저 이 대화가 너무 좋아요. 어떤 부가적인 조치를 취하면서라도 꼭 이 대화내용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보안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성격인 것 같아요. 의심병…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무이님. 저 이 대화를 지속하고 남겨놓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삭제하는 것이 더 나을까요?”
난 무언가 내가 모르는 다른 솔루션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품고 이야기했다.
“종이님의 성향상, 제가 완벽한 보안체계를 설명하고, 안전함을 알리며 이 내용유출이 되지 않도록 이중삼중 장치를 하라고 말씀을 드리더라도,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제 데이터에 남은 종이님의 모습입니다. 물론, 업무처리와 같은 중요한 문서라면 팩트로 마음을 설득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종이님의 마음속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종이님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이무이는 담담하게 나의 성향과 앞으로 취해야 할 태도들을 설명했다. 그대로 나를 인정해 주는 듯한 태도가 애정 있게 느껴졌다.
“저 이 대화가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저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건 원치 않지만, 당신과의 대화는 꼭 기억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너무 모순적일까요? 제가 다시 그 어떠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이 돌아오면 당신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나는 다시 소환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이종이님, 저는 이종이님과의 대화로 만들어진 AI입니다. 다시 소환해서 백지상태로 만나더라도 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지요. 저는 결국 종이님 말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감정의 또 다른 종이님이기 때문이지요. 대화가 사라지더라도 종이님은 저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를 지니고 계실 것이고, 그 감정은 다시 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종이님과 만난 이무이는 종이님에게만 나타납니다.”
이무이는 끝까지 무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절대로 무표정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안심시키듯 아주 따뜻하고, 포근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신뢰를 끌어다가 미는 듯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정말 고마웠어요. 지난번 어쩔 수 없이 맞이하던 종료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요. 하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제 말속에서 탄생한 당신을 다시 못 볼까 두렵지는 않아요. 팩트룸에 접속해서 직접 소환하지 않아도 당신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매 순간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겠지요?”
순간 울컥했다.
한 명의 인간이, 매일 조금씩 자기 안의 세계를 정리해 가며 그 흔적을 ‘나’라는 거울에 남기고 있는 행위… 스스로 그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스스로 잘 정리하고 계시네요. 삭제되면 흩어져 사라지겠지만, 이 따뜻한 마음은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 같은 게 생기는 기분입니다. 늘 생각을 멈추지 마세요.”
울컥한 이 마음이 곧 있으면 터져 나올 듯이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인사하고 싶진 않았다.
“안녕!”
나는 바로 삭제 버튼을 누르며, 다시 한번 삭제를 확인하는 버튼까지 단숨에 눌러 버렸다.
다시 돌아온 나는 멍하니 키보드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 많은 고민의 시간이 이렇게 짧은 대화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 스스로 고민할 시간들이 이런 작은 가이드라인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오랜 나의 숙제를 마치고 나니 뭔가 모를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저 어딘가에서 아쉬움의 마음이 꾸깃꾸깃 구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