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으로 인생역전 (10)
가족들이 모여 앉아 계절 논쟁을 벌이는 때가 있다. 한 계절만 선택해서 살아야 한다면 여름을 고를 것이냐 겨울을 고를 것이냐로 갑론을박한다. 나 빼고는 모두 겨울을 택한다. 기후 위기 때문인지 매년 더 더워지는 요즘 여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까지 겨울을 택할 수는 없다.
나는 생존을 위해 여름을 택한다고 했다. 나는 추위랑은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여고시절 짝꿍 은희가 말했다. “쟤는 전생에 곰이었나 봐. 겨울만 되면 왜 저리 자?” 내 별명이 곰이 된 사연이다. 겨울에는 몸이 그렇게 된다. 추위 속에 있으면 일단 어깨가 굳는다. 뇌도 일을 안 하는 느낌이 든다. 아무 의욕도 없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중요한 시험마다 겨울에 있어서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지 아마 여름에 있었다면 나는 훨씬 더 좋은 성적을 휘날리며 살았을 것이다. 겨울은 긴 잠을 자기에나 좋은 계절이다.
반면 여름은 무서운 것이 없다. 의욕과 활력이 돋고 새로운 결심도 쉽게 해 낸다. 여름에는 쉽게 일을 벌이고 마음도 훨씬 너그럽다. 그 힘든 대장내시경도 8월에는 받아볼 마음이 드는지 그동안 건강검진을 받은 날짜는 매번 8월이다. 8월 초에 친구들이랑 다녀온 경주 여행에서도 나는 한 번도 쉬자는 말을 하지 않아 일행들이 모두 내 체력을 놀라워했다. 더위를 별로 타지도 않고 설사 덥더라도 힘들지 않게 견딜 수 있는 내 체질 덕분이다. 이런 체질을 가졌으니까 만약 온도가 나를 죽인다면 더위가 아니라 추위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얼마 전 이 추측이 깨지는 일이 있었다. 다니던 대학 병원에서 암환자 정기 검진을 받은 날이었다. 일찍 찾아온 더위 때문인지 병원 전체에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다. 아차 싶었다. 여름이라고 핫팩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병원 매점에서 구할 수도 없었다. 아침 8시 반부터 얇은 검진복 차림으로, 하루종일 공복상태로, CT며 뼈스캔이며 각종 촬영과 검사를 하고 오후 5시쯤 끝났을 때는 죽을 것 같은 한기가 몰려왔다. 에어컨 추위에 종일 시달렸기 때문이다. 온몸에 얼음이 든 것 같아서 병원을 나서자마자 사우나에 갔다. 사우나를 원래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사우나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랑 같이 목욕을 갔을 때 심부름을 하느라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제대로 오래 있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들어가서 앉아 있으니 사우나의 뜨거운 온도에 숨이 막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 따뜻하다. 이제 좀 살 것 같다.’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체감상 15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온몸의 모든 구멍이 열리며 땀이 줄줄 나오는 느낌, 머리가 띵~해오는 느낌, 의식이 흐려지는 느낌. 몸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앗, 뭔가 잘못됐다. 여기서 탈출해야겠다, 는 위기감. 사우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어서 문쪽으로 겨우 나왔다. 조금만 더 있었어도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었고 사우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탕 휴게실에서 시간 반 넘게 쉰 후에야 나는 택시를 호출하여 집에 올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며칠을 시들시들했으니 몸에 가해진 충격이 상당했던가 보다. 그제야 내 판단이 매우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추워도 집에 가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먼저 차렸어야 했다. 몸에 급격한 체온변화를 들이밀 일이 아니라. 독자 여러분도 ‘아이구야~왜 그러셨소~’하시리라.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말했지 않은가. 추위에 노출되면 뇌가 정지되는 사람이라고.
그 와중에 오랜 의문 하나가 풀렸다. 나는 그동안 온열질환으로 사망에 이르는 사람들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하다 더우면 그늘에 들어가서 좀 쉬었다 하실 일이지 왜 죽을 때까지 열 속에 있다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 것일까. 내가 경험하고 나니 알겠다. 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몸이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려 애쓰는 순간을 못 보는 것이다. 평생 해온 일이라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고, 생계가 걸린 일이라 거기까지 신경을 못 썼을 수도 있고 각자에게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위기 신호를 못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죽을 수 있는 더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으리라.
나도 그랬다. 오히려 추위였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 같다. 더위라서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 여름이 자신 있다고? 그동안 실내에서 주로 일하며 살았기 때문에 더위의 무서움을 모른 것뿐이다. 내가 종일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면 죽기 딱 좋은 사람이다. 사람이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마냥 밖에 있다가 픽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이번 경주여행에서도 멀쩡했던 것은 2시간마다 카페에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고 해 주었던 일행들 덕분일 것이다.
여름 자신감을 가졌든 겨울 자신감을 가졌든 나를 포함한 세상의 둔한 자들이여. 자신 없어하는 것보다 자신 있어하는 것이 훨씬 위험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훨씬 나를 어둡게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꼭 기억하는 둔클럽 회원들이 되시도록! 여름이든 겨울이든 우리 몸은 적정 체온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그의 수고를 좀 알아주자. 그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말자. 이렇게 하여 그대들이여! 이 혹독한 계절에도 꼭 안녕하시라!
from 51세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