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서부터 남자는 영을 침실 쪽으로 몰아붙였다. 숨을 돌리기 위해 영은 입술을 떼고 남자와 눈을 맞췄다. 침으로 범벅된 남자의 입술이 촉촉했다. 침대 맡에 이르자 남자는 더 이상 틈을 주지 않았다. 차가웠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의 체온에 영은 눈을 떴다.
잠깐만. 스탠드 옆에 사육케이지가 놓여 있었다.
왜. 영을 따라 집중력을 잃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배어났다.
저게 뭐야. 케이지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물었다. 고슴도치는 제 새끼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이미 반쯤 먹혀 들어간 새끼의 몸뚱이는 붉었다. 혼자 살아야 하는 제 동물에게 새끼를 배도록 한 것은 영의 욕심이었다. 고슴도치가 출산을 하기엔 침실에서 영은 너무 법석을 떨었다.
그만 돌아가줬으면 좋겠어. 고슴도치가 벌건 새끼를 먹어치우는 동안 영은 케이지 앞에 앉아 모두 지켜보았다. 비로소 가느다란 두 다리만 남은, 새끼의 몸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톱밥더미 위로 팽개쳐졌을 때, 남자의 차는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어린이용 의자는 너무 낮았다. 밟고 올라서 까치발을 들어도 현관을 열기에는 어림없어 보였다. 키가 닿았더라도 저 복잡한 잠금장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린 영은 알지 못했다. 문밖에 선 식구들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지만 머릿속만 어지러웠다. 잠이 가시지 않아 어리둥절한데 철제문은 조금만 힘을 주어 두드려도 부서질 듯 시끄러웠다. 어린 영의 심장이 놀라 콩닥콩닥 뛰었다.
고슴도치가 죽었어요. 영은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입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말이라도. 어미가 갓 낳은 새끼를 핥아주고 있어요, 같은 말. 휴대폰 주소록에는 남자들의 이름이 수두룩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그의 이름도 아직. 영의 거짓말에 남자들은 쏜살같이 달려왔다. 몇 번째 거짓말이었을까. 그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고슴도치가 죽었다 거짓말할 곳이 없었다.
케이지를 열고 죽은 새끼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선 고슴도치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그것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눈도 맞춘 적 없이 사라진 새끼에게 영은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새끼를 내팽개치고 구석으로 기어간 고슴도치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지겹다. 그가 가져온 수컷 고슴도치와 영의 고슴도치가 교미에 성공하고 있을 때였다. 이후 그는 영을 모른 체했다. 영은 케이지를 째로 들고 베란다로 갔다. 은색 케이지 천장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난간으로 훌훌 털었다. 톱밥과 밥그릇과 고슴도치 그리고 죽은 새끼가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옆 건물과 빌라 사이 좁은 틈으로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음지가 내려다보였다.
어쩌면 부모는 영이 태어나자마자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지었는지 모른다. 의식이 들었을 때 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처럼 고통이 몰려왔다. 고통은 영의 몸 중심에서 왔다. 때문에 영은 자신이 놓인 처지를 깨닫기도 전에 복통 그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맨 바닥에 누운 채로 시간이 한참 흘렀다. 복통은 점차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은 그제야 방이 온통 하얀색 페인트로 거칠게 칠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칠이 제대로 되지 않은 틈으로 어둡고 칙칙한 누런색이 보였다.
한동안 영은 그가 잠시 권태를 겪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돌아오리라. 권태를 겪는 남자는 다그치는 것보다 잠자코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간발의 차로 영의 눈을 피해 다녔다. 다음에 영은 실종신고를 해야 할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대학은 조용했다. 실종되고 싶은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르지. 헛웃음이 나려 할 때, 온힘을 다해 그가 다른 지방대학의 정식교수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방은 영이 꿈꿔왔던 장소와 흡사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게 되면 밀폐된 장소가 되고 마는 자그마한 방. 하지만 눈이 시리도록 하얀 사방에 영은 다시 신경이 곤두섰다. 심지어 가구들까지도 온통 하얀 빛을 띠었다. 속이 갑갑해졌고 빙 둘러본 방 어디에도 창문과 문은 없었다. 방 안에는 좌식 변기와 세면대가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두 칸짜리 낮은 서랍장만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영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하는 기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은 세면대 앞으로 갔다. 세면대 위에는 영의 얼굴을 반도 비추지 못하는 조그맣고 네모진 거울이 붙어 있었다. 차라리 떼어서 손거울로 휴대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영이 허리를 반듯이 세우자 두 눈은 사라지고 거울 속으로 입술이 나타났다. 핏기 없이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아보았지만 입속도 말라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칫솔이 꽂힌 유리컵에 수돗물을 받았다. 식수로 나쁘지 않았다. 물 두 컵을 연달아 마신 뒤에 영은 차츰 숨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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