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공이 왔다. 두세 차례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엉겁결에 누른 잠금장치가 열쇠공을 애먹이는 듯했다. 곧, 하는 수 없다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오갔다. 공구로 잠금장치를 통째로 뜯어내려는지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또 한 번 놀란 영이 울음을 터뜨렸다. 흥분을 가라앉혔던 식구들이 영의 울음소리에 다시 성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잠금장치가 있던 자리에 네모난 구멍이 뻥 뚫리고 현관이 열렸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영을 꾸짖었다.
문도 하나 못 여니? 민소매 원피스 사이에 가려진 영의 가랑이 사이에서 뜨겁고 축축한 것이 흘러내렸다. 오줌은 의자를 타고 흘러 다시 신발장 타일을 적셨다. 멍청한 것. 어린 영은 다리가 데일 듯 뜨겁다고 생각했다.
베란다로 내려다보이는 좁은 틈에서는 사라진 그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영이 다니는 대학에서 그는 시간제 강사였지만 같은 학과 선배이기도 했다. 마주할 기회는 빈번했다. 교양수업에서, 학과 술자리에서, 동아리방에서, 학과사무실에서, 영이 자주 가는 도서관 인문학 코너 책장 너머에서 그는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렇지 않다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외모였다. 차라리 내 손에 죽었더라면. 영은 그토록 찾아 헤맸으나 말없이 떠난 그가 틈에 끼여 죽어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슴도치와 죽은 새끼와 단란히 죽어가는, 그 새끼.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계속해서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연갈색 눈썹과 오똑하진 않지만 작은 코, 고른 치열이 마음에 들었다. 각진 턱은 늘 불만이었다. 정작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데도 성형을 고민했다. 그 자리에 한참이고 붙어 서서 각도를 틀어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뺨은 패이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치 야윈 상태였다. 작은 거울에서 거대한 힘이 자신을 빨아 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들여다보게 됐다. 화들짝 놀라 거울에서 물러섰다. 문득, 자신이 건너다보는 거울 속의 여자가 자신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영은 현재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완벽히 차단된 장소에 자신이 놓이게 됐는지. 그것이 어떤 위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영은 현재 자신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그가 놓인 처지에 따라 어떤 사람으로든 바뀌기 마련이다. 상황 역시 언제든 변한다. 두려움은 자신을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지금 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위험에 놓여 있었다.
영은 이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 사랑은 달콤한 케이크 같은 거였다. 말썽 한번 피운 적 없는 학창시절은 달콤한 케이크를 먹기 위해 인내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감금되고 말았고 어떤 위협도 없이 그냥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조차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장소. 그럴 때 사람은 그 과거가 사실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까.
고궁 안에 전시된 외국작품이라니, 영은 낯설게 생각했다. 그가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을 전시였다. 돌담에 이르자 붐비는 인파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은 조금 뒤쳐져서 들어갔다. 마침 큐레이터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영은 정신이 산란해진 때문에 그 무리에도 끼지 않았다.
전시실 이 층에 이르렀을 때 그림 한 폭이 영을 잡아끌었다. 캔버스 가득 경직된 눈이 크게 담겨 있었다. 영은 우뚝 멈춰 섰다. 불안한 징조처럼 동공은 줄어들고 흰자위가 과장되리만큼 큰 눈이었다. 인간의 눈이 아닐지도 몰랐다. <우주의 눈 A2>이라는 작품명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보고 있는 그림이 사실은 너를 바라보고 있지. 단체 관람이 있을 때마다 수차례 관람했을 전시실에서 그는 학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여학생에게 한 마디씩 붙였을지 모른다. 긴장된 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눈에서 무얼 느끼지? 불쾌한 그림이었지만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욕망을 들킨 기분이야. 영이 반문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말했다.
서랍장 맨 위 칸을 열어 보았다. 영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하얀색 원피스로 빼곡했다. 스스로 산 기억이 없는 옷이었다. 모두 영의 몸에 꼭 맞는 치수였다. 이건 일반적인 납치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다시 복통이 시작되었다. 영은 원피스를 배꼽 위까지 들춰 보았다. 실낱같지만 뱀처럼 긴 상처가 배꼽 아래 곧게 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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