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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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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Aug 09. 2024

<케이지> -3-

거실만큼 넓은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어린 영은 소파 위를 뛰어다녔다. 그때마다 부드러운 가죽이 발을 삼킬 듯 움푹 꺼졌다. 영이 느끼기에 어머니는 반나절을 주방에서 보내는 사람 같았다. 실수로 전축의 볼륨을 최대로 높였을 때서야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오전에도 영은 눈물을 훔쳤다. 초인종이 울렸지만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압력밥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앓는 소리에 귀를 먹은 듯. 도마질 소리만 탁, 탁. 어린 영은 이제 의자 없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쭉 뻗은 손끝이 가까스로 현관을 열었을 때, 낯선 여자 둘이 밀고 들어왔다.

할렐루야!

복통은 거기서 오고 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영이 확신하는 한 자신은 평생 수술을 받은 기억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처는 납치범에 의해 생긴 것이다. 문을 찾아 벽을 더듬었다. 부술 기세로 벽을 두드렸다. 벽 너머 납치범을 향해서 고함을 질러대던 영은 겨우 제풀에 지쳤다.

그때에서였다. 영이 방 한가운데 놓인 갈색 상자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상자 위에는 ‘받는 이, 영’이라고만 씌어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는 께름칙했다. 여태 협박의 말은커녕 그림자도 드러낸 적 없는 납치범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이 영을 흥분시켰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어떤 메시지이든 간에 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빠르고 거칠게 포장된 상자를 뜯는 손이 멋대로 떨려왔다.

뭔가를 키워보는 게 어때. 그가 바지 지퍼를 추어올리면 영은 바지가락을 붙들었다. 영을 뿌리치기 어려웠는지 그가 권유했다. 그의 말대로 영은 곧바로 고슴도치를 사들였다. 쌍으로 키우지 않아도 좋은 애완동물은 수두룩했다. 강아지와 고양이, 햄스터 아니면 물고기라도. 사람이 키우는 동물들은 야생의 것보다 못할지라도 그 주인보다는 강하다. 사람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누구건 대체된대도 크게 무리는 없다. 그가 아니라는 이유로 슬픔에 치어죽는 일 따위는 없다. 영은 동그란 몸에 온통 가시를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가 측은했다.

갈색 상자 속에는 살아 숨 쉬는 갓난아이가 조용히 영에게 눈길을 보내며 누워 있었다. 혼돈이 영의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던 상자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벽 너머 납치범이 영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생각들. 혹시 납치범은 영이 누구든 간에 상관없이 그를 우롱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영이 그렇게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을 때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얀 방 가득 아이의 울음소리가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영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영의 손길을 내놓으라는 듯이 우악스럽게 울어댔다.

케이지 속에서 고슴도치는 수북한 톱밥 사이를 가르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도 그가 오면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창살에 매달렸다. 침대 속에서 분주한 그와 영을 구경하는 듯했다. 영이 곤충류 간식을 집개로 집어주자 그때서야 고슴도치는 낯선 남자에 대한 관심을 껐다. 고슴도치는 살아 있는 곤충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플라스틱 통 안에서 아직 생을 만끽하고 있는 벌레들. 영이 선물한 수컷 고슴도치에게 그는 더럽다는 이유로 벌레를 주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영은 유일한 가족을 위해 그 정도는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에 놓칠세라 아이가 영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힘은 두려움이 되어 영을 엄습했다. 이거 놔. 그는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워 바지가락을 잡고 늘어지는 영을 더 이상 측은해하지 않았다. 싫어요, 선생님. 영을 뿌리치는 그는 완강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가했다. 그리고 영은 너무나 쉽게 나동그라졌다.

아이에게 붙잡힌 손가락을 겨우 거둬들인 영은 세면대 앞으로 갔다. 방 안에서 영이 자신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거울 한 장뿐이었다. 아이 같은 건 없었다. 착상되긴 했지만 육안으로 볼 수도 없는 그것을 아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영은 아니라고 되새겼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안내가 끝나기 전에 종료 버튼을 눌렀다. 변기 위에 앉아 있은 지가 오래였다. 네 번째 임신진단기였다. 영은 실수한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운을 하소연하거나 거짓말할 곳이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됐어요, 저도 이젠 가족이 있어요, 세 식구예요. 건조한 눈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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