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 방 안에 거울이 있음에 감사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영은 여러 가지 기억들을 되새기고 자각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영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대상이며 자신은 결백을 외칠 수 있는 피해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했다.
과제를 위한 단체관람이 끝나고 근처 국밥집에서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은 흩어지고 그가 인솔하던 소설 동인회 회원 일곱만 남았다. 여고생 티를 벗지 못한 영은 단짝을 따라 동인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이 근처라고 넌지시 말했다. 남학생 둘이 호칭을 바꿔 선배 작업실에서 2차를, 떼밀었다. 이제 남학생들은 그와 어깨동무까지 걸곤 가로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수험생 시절 한번 와본 적 있는 다른 학교의 캠퍼스에는 벚꽃이 빼곡 심어져 있었다. 여학생 셋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벚꽃을 잡아보려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얀 벚꽃이 가로등불빛을 받아 밤을 하얗게 만들었다. 후문에 다다르자 편의점 간판만 휘황찬란했다. 그곳에 육중한 비석처럼 칙칙하고 차가워 보이는 원룸촌이 나타났다.
연갈색 머리칼이 제법 풍성하게 자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랗고 쌍까풀이 진 눈이었다. 아이는 이제 울지 않고 영에게 집중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발장구를 치기도 하면서 영과 더 가까워지려는 듯이 계속해서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무표정한 영을 향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는 게 뭐야. 영은 벽 너머 납치범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가 웃음을 뚝 그쳤다. 정적이 감도는 하얀 방 안에 갇힌 채 납치범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영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아이를 툭 내던지고서 영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든 하길 바라는 게 아닐까.
그러나 더 알 수 없는 것은 영 자신이 바라는 것이었다. 영은 낯선 장소에서 나가고 싶은 것인가. 그게 아니면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하는가. 나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아니면 애초에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어야 하는 게 정당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영이 아닌 누군가 납치범의 타깃이 되어야 했다면 그게 영이 아닌 것은 정당한가에 대해서도 영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면대와 거울과 좌식 변기와 서랍장만이 있는 방에서 영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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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타나지 않은 지 세 계절이 지났을 즈음 영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었다. 고슴도치의 장례를 치러줄 의미에서였다. 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굳게 잠긴 초록색 철문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 왜 문이 달려 있는지 영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인근 사람들은 철문 덕분에 쓰레기더미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베란다에서라면 언제든 영은 쓰레기더미가 이뤄낸 하나의 산을 내다볼 수 있었다.
텅 빈 케이지 앞에 초를 켰다. 그르렁거리는 늙은 개의 숨결처럼 촛불이 흔들렸다. 어쩌면 여태 살아 있을지 모를 고슴도치를 애도했다. 그리고 영은 공구함을 뒤져 장도리를 집어 들었다. 한밤중 골목은 조용했다. 꽉 끼는 블라우스가 거슬렸지만 영은 그대로 작업을 시작했다. 장도리로 초록대문 너머를 은둔해주는 자물쇠를 수차례 내리찍었다. 차가운 마찰음이 영의 귀를 찔렀다. 그럴수록 영은 대담해져서 더 높이 장도리를 치켜들었다.
초록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렸을 때 영은 자신이 버린 것들을 찾을 수 없었다. 이따금 다 태운 담배꽁초를 던져버리긴 했지만 이미 그런 미세한 것들을 찾아볼 수 없이 쓰레기 더미는 거대했다. 낡은 유아용 의자 같은 것들도 버려져 있었는데 왜 기어코 그것을 틈으로 던져야 했을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틈 속에 쓰레기를 채워두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버리기는 아쉽고 쓸 수도 없는 것들을 틈에 채워 넣는다. 그리하여 자신이 무엇을 버렸는지조차 잊어갈 때쯤 창문으로 들어오는 해를 가릴 만치 쌓인 쓰레기 산을 알아채고 뒤늦은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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