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건물을 ‘고정된 구조물’로 인식해 왔습니다. 지어진 순간 기능이 고정되고, 사용자에겐 그저 적응의 대상이 되는 일방적인 환경 말이죠. 하지만 이제, 건축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공간이 사람의 리듬에 반응하며 스스로 조절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인공지능, 그리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읽어내는 센서들이 있습니다. 건물은 더 이상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반응하며, 효율성과 쾌적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하나의 유기체에 가까워지고 있죠.
오늘은 그런 변화의 최전선, 즉 ‘스스로 움직이는 공간’을 중심으로 AI가 어떻게 건물 내부 시스템을 바꾸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동시에, 그 안에서 건축가의 역할이 어떻게 다시 정의되고 있는지도 함께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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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간이 사람을 읽기 시작할 때
조명, 온도, 환기… 건물이 알아서 반응한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에너지 시스템 안에 살고 있습니다.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온도를 조절하며 공간을 조율하죠. 하지만 AI는 이 ‘조율’이라는 작업을 사람 대신 스스로 해냅니다.
예를 들어, 암스테르담의 The Edge는 AI 기반 센서 시스템을 갖춘 대표적인 스마트 오피스입니다. 직원이 사무실에 도착하면 AI는 그 사람의 자리, 일정, 선호 온도까지 모두 파악해 해당 공간을 자동으로 조율하죠. 회의실에 사람이 없으면 조명은 자연스럽게 꺼지고, 오후 햇살이 잘 드는 시간엔 창가 조명이 줄어듭니다. 사람이 움직이기 전에, 공간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죠.
비슷한 시도가 구글 마운틴뷰 캠퍼스에도 있습니다. 수천 개의 센서가 실시간으로 공기 질, 습도, 온도, 채광 상태를 측정하며 HVAC(냉난방 및 환기) 시스템을 자동으로 조율합니다. AI는 단지 쾌적함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는 일종의 ‘건물의 두뇌’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2. 공간은 사용자의 패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일회성이 아닌, ‘학습하는 공간’으로의 전환
건물이 반응한다는 것은 단지 실시간 제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AI는 패턴을 학습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죠. 말하자면, 공간도 사용자의 삶을 ‘배워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런던에 위치한 한 공유 오피스에서는 AI가 일주일치 회의실 예약 패턴을 분석해, 자주 사용되지 않는 회의실을 유휴 공간으로 전환하고, 그 공간에 필요한 냉난방 시스템 가동도 조정합니다. 덕분에 공간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에너지 낭비도 줄어들었죠.
이처럼 AI는 공간을 실시간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적응’하는 주체로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자동화의 수준을 넘어선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설비를 넘어 건축의 설계 자체가 바뀐다면
AI가 조절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된 공간. 이제 일부 건축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건물 내부 시스템만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죠.
미국의 MIT Self-Assembly Lab에서는 모터와 AI 기반 알고리즘을 활용해 가구나 벽면이 자동으로 움직이거나 접히는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감지한 뒤, 형태가 바뀌는 가변형 건축입니다. 책상이 펼쳐졌다가 접히고, 파티션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풍경은 더 이상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건축이 점차 정적인 상태에서 유동적인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설계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이렇게 생긴 건물을 지을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공간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하나의 설계 요소로 들어가는 시대가 온 것이죠.
4. 그럼에도, 건축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술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공간은 더 효율적이고, 운영은 더 합리적이며, 사용자 만족도는 높아지겠죠. 하지만 여기서 건축가가 맡아야 할 역할은 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AI는 인간의 감각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합니다. 같은 온도라도 한 공간은 ‘쾌적하게’ 느껴지고, 또 다른 공간은 ‘차갑게’ 느껴지는 차이를 AI가 판단하기란 아직은 어렵습니다. 빛이 드는 방향, 재료의 질감, 공간의 리듬과 여운 같은 요소들은 숫자로 측정하기 힘든 영역이기도 하죠.
결국 건축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공간은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방식으로 반응해야 한다”고요.
건축가는 기술이 놓친 감각을 채워 넣고, AI가 계산한 최적의 방식 위에 삶의 디테일을 덧입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공간일수록, 그 움직임의 방향을 설계하는 사람의 감각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마무리하며: 움직이는 공간, 생각하는 설계
‘스스로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말은 단지 기술적 진보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건축이 사람을 더욱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건축이 말없이 대화하고, 조용히 맞춰주는 시대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빛을 바꾸고, 공기를 조절하고, 벽을 움직이는 건물은, 그저 효율적인 기계가 아니라 더 섬세한 공간 경험의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AI와 함께 설계하게 될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술이 디지털 감각을 넓혀주는 동안, 인간은 그 위에 삶의 온도를 더하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의 공간을 조율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