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운다

by 윰글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가 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웠다. 실컷 공부했는데 시험에 다른 문제가 나오기도 하고, 잘 알던 문제를 풀지 못해 속상하곤 했다. 체력장에서는 매달리기를 잘할 것 같았지만 1초 만에 추락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다른 사람과 친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기도 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는 모든 것이 또다시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몰랐고, 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성적 때문에 마음이 자주 흔들렸다.


교사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은 아이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이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고, 조용히 쉬고 싶은 날이면 꼭 누군가 나를 찾는다.
“뭐,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지?”
어른들은 죽고 사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죽을 복’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씁쓸하다.


어떤 이는 ‘욕심을 버려라’고 말한다. 나는 크게 욕심내는 사람도 아닌데, 왜 삶은 자꾸 내 기대에서 벗어나는지 모르겠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 평범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삶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흘러가야 하는 만큼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 같다. 햇볕을 손으로 가릴 수 없듯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어떤 존재처럼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말한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지나가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2024년은 나에게 ‘아픔을 통한 성장’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해였다. 그것을 ‘성숙’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해는 많이 아팠다. 가슴이 찢어진 듯한 느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흔들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관계든 신념이든, 혹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든 간에. 그 불안의 시간에 나를 붙들어준 건 오직 글이었다. 불안 속에서도 나는 글을 썼고, 그 글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결국 나를 붙잡아준 것은 ‘출간’이라는 목표였다.


“글짓기를 잘해서 이 상을 드립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대표로 나간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던 그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나는 작가가 될 거야.”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출간까지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원고를 쓰고, 고치고, 다시 다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서 한 문장 한 문장 고쳐 쓰며 “이게 과연 누군가에게 닿을까?”라는 의심과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는 다짐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 이름이 적힌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초등학교 4학년의 설렘이 다시 찾아왔다.


중학생 때부터 일기를 썼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파란 표지 두꺼운 노트는 지금도 기억난다. 시험 스트레스, 친구와의 다툼, 진로 고민을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 글들이 훗날 내 책의 밑거름이 될 줄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은 필사하면서 여러 번 읽었다. 하루를 기록하고 나에게 남기려는 마음에서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의 글은 자라고 단단해졌다.


지금도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잠들기 전, 일상 속,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리고 무엇인가에 온전히 빠져들었을 때. 나는 글로 그 시간을 남기고, 그 일상에 감성을 입힌다. 그렇게 쓰면 다른 사람도 읽을 만한 글이 된다. 물론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얼마 전 한 독자가 보낸 메시지는 나에게 큰 위로였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짧은 문장은 어떤 상보다 값졌다. 내 글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나 역시 책을 통해 타인의 이야기에 기대어 치유를 얻었다. 이제는 내 글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새로운 도전은 나를 다시 꿈꾸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직장은 일을 하는 곳이지만 ‘일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 동료를 따르고 좋아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런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관계가 피어나기도 한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직장 내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어제 내 앞에서 누군가를 헐뜯던 사람이 그 대상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는 그렇게 살아간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 친하면 친한 대로, 멀면 먼 대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업무적으로 소통하며 인간적인 부분도 나누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그 부분을 도려내거나 조용히 수정해 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특별히 어렵거나 가깝지도 않은, ‘무던한 사이’를 유지한다. 그 온도가 오히려 좋다.


지난 학교에서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함께 웃고 울었던 동료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감동을 준 학생들. 그들과의 작별은 아쉬웠지만,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25년, 나는 새 학교로 이동한다. 새로움은 설렘을 주고, 변화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기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색의 문화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에 나는 에너지를 쏟는다. 교사라는 직업은 해마다 새로움을 선물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일, 새로운 감성을 깨우는 일,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쌓는 일이 나를 다시 구성한다.
작년 봄, 한 학생이 조용히 쪽지를 건네며 쓴 글귀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 덕분에 꿈이 생겼어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지금, 한 해의 시작을 앞두고 나는 설렘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낀다. “괜찮을 거야. 나는 잘할 거야.”라는 소소한 다짐이 나를 일으킨다. 시작 앞에서 자신감을 갖는 일은 의지로 일구어야 하는 밭과 같다. 낯선 건물로 향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는 일은 이전보다 어렵지 않다. 다만 내 안의 무게를 조용히 꺼내어 ‘적응’이라는 숟가락을 든다. 차려진 밥상 위에 하루하루를, 2025년이라는 그릇에 천천히 담아낼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설렘이다.


글로 만나는 분들과의 소통은 또 다른 설렘과 성장을 약속한다. 나는 매일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잘할 거야. 여태까지 잘해왔잖아.”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6화아이의 성장, 부모의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