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우다
‘검정 도시’
정치에 관심이 생겼다. 불안정한 현실을 마주할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붙잡고 싶다.
코로나 시절, 부산 중구 남포동은 밤 8시만 되면 암흑 같았다. 가게 대부분은 문을 닫고,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네온사인이 꺼진 거리는 마치 미국 영화 속 슬럼가처럼 느껴졌다.
“나 오늘 무서워서 혼났어.”
거제도에 사는 여동생이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친구와 헤어진 후 내게 한 말이다.
그때였던 것 같다. 내 정치적 관심이 살아난 순간이.
‘코로나’와 ‘정치’는 무슨 상관일까. 정치가 잘못해서 생긴 상황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그 순간 정치가 방향을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정치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혼란 속에서도, 누군가는 방향을 잡아줄 거라고. 그 역할이 정치라고 생각했던 건 같다.
2024년 12월 3일 PM 11:00
첫 책 출간을 위해 원고를 최종적으로 수정하고 있었다.
“지금 뉴스에 난리가 났어. 뉴스 보는 중이야?”
“왜, 무슨 일인데?”
인터넷을 열었다. 친구의 말 그대로 난리였다.
“저거 가짜 뉴스 아니야?”
하지만 사실이었다. 뉴스 내용을 읽는 순간,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신랑은 시댁에 가족 행사로 가 있고, 아이 둘과 나만 집에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안감이 잔잔하게, 그러나 빠르게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뉴스를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순간의 불안감을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정리되었다. 국가 위기까지는 가지 않고, 하나의 ‘촌극’으로 마무리됐다. 누군가에게는 그 밤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인 중 한 명은,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우리 오늘 학교에 안 가도 되나요?”
둘째가 물었다. 비상 상황에서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마음이 어수선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전날 밤 이야기가 자연스레 주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4일 후, 관련 회의가 열렸고 상황 수습에 힘을 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조차 목소리를 냈다. 그만큼 무거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상황의 전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희망을 품고, 앞날을 소망한다.
어릴 적, 나는 뉴스를 자주 보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뉴스에는 주로 사건, 사고 등 부정적인 내용이 많았다. 뉴스만 보면 기분이 나빠졌고, 나는 뉴스를 잘 듣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해진 것도.
“책을 보자.”
“글을 쓰자.”
“공부하자.”
이것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은 아이들은 “네, 그럴게요”보다 “안 할래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말로 거절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어른의 말을 부정한다. 그 순간, 아이에게 보이는 어른의 모습은 이미 설득력을 잃은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보여주는 모습이 아이의 본보기가 된다는 뜻이다. 말투, 가치관, 행동 방식. 부모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보고 배운다.
“너는 왜 그렇게 짜증을 내니?”
“엄마가 짜증을 내잖아요.”
어릴 적 큰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짜증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국 나 역시 행동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말투를 교정했고, 놀랍게도 아이는 변했다.
‘아이는 부모를 복사한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 만나는 어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많은 어른을 보고, 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며 아이는 자라난다.
오늘 아침, 교실에서 한 아이가 묻는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누구 잘못이에요?”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어릴 적 나는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모든 걸 알겠지.”
“어른이 되면 다 잘하겠지.”
지금은 안다. 어른이라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내 행동을 돌아본다. 책을 통해서든, 더 어른에게 물어보든, 끊임없이 의심하고 증명한다. 때로는 흔들림을 겪은 후 내 언행을 정리한다. 나처럼 고민하는 어른들이 모인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소신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한 가지는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있고, 우리의 행동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자식에게 존경받으면 성공한 사람이다.’
어릴 적 방송에서 들었던 말이다.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이 말이 옳다고 느낀다.
지금 TV 뉴스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바른 것인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다.
“그 자리에 가려고 했을 때의, 그 초심을 지키고 있습니까?”
다수를 위해 행동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 혹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른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역사’로 기록된다. 그 역사 속에서, 내 아이는 보고,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언젠가 또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아이의 가슴에 녹아든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있다. 어른은, 아이 앞에서 쓰는 역사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 이 역사를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설 때, 우리의 작은 발자취가 ‘도약판’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보여준 진심과 선택이,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