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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성장, 부모의 기다림

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우다

by 윰글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금요일 저녁 8시가 되면 TV 앞에 앉아 숨을 죽이고 화면 속 이야기들에 몰입한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과 행동 문제를 들여다보며, 전문가의 도움으로 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를 고치는 과정’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남기는 흔적과, 그로 인해 아이의 성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비춘다. 그래서인지 화면을 보며 문득문득 공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예전의 나는 아이의 잘못을 그 아이의 선택과 책임으로만 보았다. 하지만 프로그램 속 부모와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아이의 행동 너머에는 부모의 말과 행동이 깊게 배어 있고, 그 자취는 아이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부모가 잘하면 아이가 저절로 잘 자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내가 통신문을 꼭 제출하라고 여러 번 당부해도 일주일 내내 가방 속에 그대로 넣어 다녔다. 숙제를 챙기려 해도 내 말을 쉽게 따르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아이는 독립된 존재다. 부모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가르쳐도, 아이는 부모의 기대대로만 자라지 않는다. 만약 부모가 이끄는 대로 아이들이 따르면, 세상은 똑같은 모습의 아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받되,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건너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간다. 그렇기에 부모의 기대와 아이의 실제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필요하다.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같은 설명을 모든 아이에게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때로는 내 의도와 달리 스스로 길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도 있다. 그럴 때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고 자책이 스며들지만, 사람의 변화는 결국 타인이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변화는 결국 스스로 깨닫고, 경험하며, 느끼는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아이의 변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깨달았고, 교사로서 느끼던 자괴감도 줄었다.




“엄마, 우리 또래들은 왜 금쪽이를 보는지 아세요?”

20대 중반인 큰딸이 어느 날 이렇게 물었다.

“글쎄, 왜?”

“금쪽이를 보다가 ‘우리 엄마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한대요.”

“와, 생각도 못했네.”

그 말을 듣고 나도 잠시 과거를 돌아보았다.

나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늘 아버지가 무서웠고, 잠들기 전이면 ‘오늘은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하루를 되돌아보며 조심스러워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덕분일까, 크게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반감이 쌓였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감정은 ‘꼭 성공해야 한다. 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아이는 어떤 부모를 만나든 결국 스스로의 판단으로 길을 걸어간다. 나처럼, 그리고 우리 집 아이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직장 때문에 오래 곁에 있어주지 못했거나, 더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고 느낄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이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우울감을 보이면 ‘내 잘못일까?’ 하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자책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간을 지나며,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럴 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하며 자라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기다리며, 사랑으로 응원해주는 것.


‘금쪽이’에 출연하는 부모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다 보면, 이는 곧 부모의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순간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자책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성찰이다. 오은영 선생님은 부모에게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면서도, 변화의 주체는 결국 아이임을 강조한다. 즉, 아이가 스스로 변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이 점을 배웠다. 25년이라는 시간의 육아가 주는 힘겨움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결국 그 순간들은 지나갔다. 그리고 아이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는 있다. 부모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처를 안고 아이를 키운다면, 그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닿는다. 그렇다면 엄마가 힘들 때는 누구에게 기대야 할까. 자신의 과거 상처와 현재의 감정을 동시에 다스리며 아이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두 가지 고통이 겹쳐 힘겨워질 때면, ‘금쪽이 가족’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 역시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육아의 여정 속에서는 진퇴양난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아이가 자아를 세우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부모의 기다림과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아이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둘 다 지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서로를 탓하면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결국 다시 불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악순환이자 서로를 지치게 하는 과정이다. 이런 순간에는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리며, 서로의 곁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우리가 시간이 멈춘 듯 느꼈던 그 순간에도 조용히, 충분히 자라고 있다.

큰아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나는 육아의 극심한 피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불편한 점이나 필요, 원하는 것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울음 대신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얼마나 큰 행복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방송에 나온 금쪽이는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음에도, 부모와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 아이를 힘들게 했을까. 무엇이 엄마와 아이 모두를 지치게 했을까. 그 원인은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가 더 어릴 때 무심코 던진 부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따라서 금쪽이가 보이는 행동은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의 결과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금쪽이의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나는 오늘의 금쪽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천천히 변해도 돼. 너는 사랑받고 있어.”


어른보다 아이는 더 말랑하고, 변화 가능성도 크다. 부모가 아이를 믿고 기다리며 사랑으로 감싸주면, 아이는 변할 것이다. 그 긴 터널을 지난 끝에는 밝은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금쪽이도, 금쪽이의 부모도 힘을 내길 바란다.

부모로서 ‘아이를 잘못 키운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은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 역시 아이의 사춘기를 지나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 끝에 건넨 나의 말이 아이의 감정을 건드린 순간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나의 상처를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책 대신, 아이에게 ‘선택과 변화’를 위한 시간을 제공하고 기다린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변한다. 부모도, 아이도 그 과정 속에서 한층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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