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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의 숨

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운다

by 윰글

“엄마, 저 봉사활동으로 연탄 나르러 가야 하는데, 태워다 주실 수 있어요?”

“그래, 가는 곳이 어디지?”

큰아이가 중학생이던 시절, 저녁을 먹다가 이렇게 말했다. 웬 연탄배달일까? 부산 초량까지 태워주러 나서며, 나는 ‘이 아이가 과연 연탄을 잘 나를 수 있을까’ 걱정했다.

“오늘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글쎄, 한 줄로 몇 백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길게 서서, 연탄을 손에서 손으로 날랐어요.”

예전에는 연탄을 나를 때, 일명 ‘연탄지게’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이 지게에는 보통 연탄 10장에서 20장 정도를 실었다. 그런데 줄을 서서 나르다니. 한 사람에게 드는 힘은 줄어들 테니, 효과적인 방법임이 분명하다.

“허리가 빠지는 줄 알았어요.”

처음 해보는 일이니, 큰아이는 꽤 힘들었을 것이다.


퇴근 후, 지인들과 카페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 왼쪽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흰색, 연한 갈색 원통에 구멍이 아홉 개 정도 뚫려 있었다.

“우와, 이거 연탄 아니야?”

“너무 재밌다. 어떻게 이런 모양을 만들었을까?”

나와 비슷한 연배라면 이 빵을 보고 탄성을 참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차를 주문하고, 연탄 모양 빵도 쟁반에 담았다. 빵을 담는 동안 왠지 가슴이 가열되는 듯했다.

“딸기잼이 있으면 더 좋겠어.”

선배 한 분이 말했다. 실제 연탄불은 검은 구멍 사이로 붉게 타오르지만, 오늘 먹은 빵은 흰색 크림이 발라져 있었다. 색은 조금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그 빵이 불러온 ‘추억’이었다.

연탄은 우리와 언제부터 함께였을까.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였다. 1990년 이후 대부분 가스와 전기로 난방하면서 사용량이 줄었고, 지금은 지방 일부나 산간 지역에서만 사용된다




“얼른 창문 열어!”

“아, 이게 무슨 냄새지?”

자다가 아빠의 고함소리에 잠이 깼다. 이상한 냄새가 나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거실로 나갔지만 몸이 비틀거렸다. 눈앞에 뒷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가 뛰쳐나가신 듯했다.

‘살 수 있겠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직감했다. 우리 집에 연탄가스가 퍼졌다는 것을. 막냇동생이 먼저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갔고, 엄마, 나, 오빠가 차례로 뒤를 따랐다. 이미 문은 열렸고, 산소가 공급되었다. 모두 무사했다.

45년 전, 아직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가 쓰러졌던 자리, 아빠의 비명소리, 자다가 울던 막냇동생의 소리.

그날, 신은 우리 가족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새벽에 연탄 좀 갈자.”

“네, 엄마.”

잠이 덜 깬 채 집게를 들고 부엌 아궁이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두 장의 연탄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아래쪽 것은 흰색이 남아 있었고, 위쪽 것은 검은색이 남아 있었다. 손에 든 집게로 붙어 있는 연탄을 꺼내 분리하였다. 그리고 위쪽에 있던 연탄만 아궁이에 다시 넣는다. 그 위에 새로운 연탄을 올렸다. 이렇게 할 때 위아래 연탄의 불구멍을 잘 맞춰야 불이 잘 붙는다.

어린 나에게 이 새벽의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말씀이었기에 묵묵히 따랐다. 코를 막고 연탄가스를 피하며, 쌀쌀한 겨울바람도 견뎌냈다. 그리고 이 일을 끝낸 뒤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에 몸을 눕히면, 그제야 모든 귀찮음이 사라졌다. 그러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꿈나라로 돌진했다.

이렇게 연탄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일부였다. 때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그 안에는 ‘가족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연탄은 힘든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아픔’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연탄이 ‘훈훈함’을 일으키기도 한다.

돼지갈비, 삼겹살, 소불고기 같은 고기류는 연탄불에 구우면 향과 풍미가 살아난다. 채소, 버섯, 떡, 마늘 같은 부재료도 함께 구워지며 음식 전체에 따뜻함이 배어난다. 연탄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앉으면, 손을 모으기만 해도 가족이 하나 된 듯한 포근함이 생긴다.


또한, 연탄은 단순히 방을 데우는 난방 연료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슴을 녹이는 온기를 전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온돌’이 내어놓는 아랫목에 손이라도 넣으면, 손끝이 녹아내릴 듯했다. 부모님은 그곳에 밥그릇이나 온수통을 두셨고, 이불을 깔면 식구들은 서로 먼저 발을 넣으려 다투기도 했다. 이 아랫목 덕분에 가족들이 모였고, 서로의 발끝이라도 맞닿으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연탄불을 피우는 과정은,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상대의 마음도 살펴야 한다. 연탄이 달아오르듯, 관계도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뜨거워진다. 새로운 만남은 처음엔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그 온도가 높아진다. 두 개의 연탄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뜨거워지듯,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번개탄처럼, 누군가의 소개로 갑작스레 만나기도 한다.


특히, 맞붙어 있는 두 연탄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아래에 있는 연탄은 부모이고, 위에 있는 연탄은 아이다. 부모도 젊은 시절에는 그 역할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식에게 자신의 불꽃을 전하는 방법을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는 자신만의 색과 불꽃을 아이에게 전한다. 그 아이는 그렇게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며, 그 온기를 이어받는다. 이렇게 부모는 자신의 몸을 데워 아이에게 온기를 전하고, 천천히 희미해진다. 검은 머리가 서서히 파뿌리가 되듯, 그 색을 잃어간다. 그 뒤 자식은 또 다른 생명을 품고, 부모의 길을 다시 걷는다. 그 길은 분명 고되고 아프지만, 슬프지 않다.


또한, 연탄은 연인 사이의 관계와도 비유할 수 있다. 처음엔 어색하고, 마음의 거리를 두며 ‘이 사람이 내 사람일까?’ 고민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뜻밖의 따뜻함에 마음이 녹아내리며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인연으로 평생 곁에 두게 된다. 이런 인연의 온도는 참 따뜻하다. 사람의 관계는 때로 데일 만큼 뜨겁지만,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며 부드럽고 은은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온도가 더 좋아진다.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화상을 입히지 않을 만큼의 따뜻한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그 온도는 아마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불꽃일 것이다. 그 불꽃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마음에 따라 때로는 높아지고, 때로는 낮아지며 흔들린다. 나는 그 온도를 스스로 조절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은근하게 살아가고 싶다. 마치 새벽녘, 일어나기 힘들지만 연탄을 갈 듯이—타인을 바꾸려 하기보다 나 자신을 조금씩 덥히며 살아가고 싶다.


내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다.

그 불씨는 부모로서 아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바탕이 되며,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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