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머물고, 느끼고, 배우다
‘작별 인사’
오늘은 송별회가 있는 날이다. 동 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자갈치의 한 횟집으로 향했다. 올해 3월, 첫 환영회를 열었던 곳이다. 그때는 새 출발의 설렘으로 마음이 들떴었다. 그런데 오늘은 같은 자리에 앉아, 한 해의 끝을 보내고 있다. 낯설 만큼 익숙하고, 익숙해도 낯선 자리. 나는 오늘 2025학년도의 시작과 끝을 만난다.
만남과 헤어짐은 줄이 달린 털장갑의 양 끝처럼 연결된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다양한 일이 있었다. 기쁨, 슬픔, 초조함 그리고 때로는 안타까움도 있다. 그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또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없지만, 근무지를 옮기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아마 나이를 먹으면서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에 마음이 더 기우는 것 같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그 만남이 낯설진 않지만, 여전히 긴장감이 있다.
‘내가 가도 괜찮을까?’
‘나처럼 나이가 많은 선배를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5년 전쯤부터였던 것 같다.
“학교 옮기는 것이 싫다.”
선배님들의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공감하지 못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굳이 신경 쓸 일인가?’
하지만 이제 내가 50세를 훌쩍 넘기고 보니, 왠지 모르게 선배님들과 같은 마음이 된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저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조용히 지나 보낸다.
‘헤어짐이 만든 구멍’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 그들과의 이별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래서 곧 찾아올 새로운 만남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지난 인연 중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은 사람은 가슴속에 저장한다.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르며 그리움이 밀려온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다. 사랑은 꼭 남녀 사이에서만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억지로 색을 칠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쓸쓸함과 그리움 같은 마음은 서로에게서 일치할 수도,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감정의 온도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억지로 맞춰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감정의 변화를 강요한다면, 나는 아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것이다. 억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타인에게도 요구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겠다고, 나는 끊임없이 다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별로 생긴 공백이 결국 새로운 인연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아도, 우리는 어느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루를 살아낸다. 이별이 남긴 공허함도 다른 누군가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조금씩 상쇄된다. 그러니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마음도 결국은 해결될 것이다.
‘끌림과 인연의 씨앗’
거리가 멀어도 가까이 있는 듯 느껴지고, 바로 곁에 있어도 멀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인 듯하다. 이렇게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끌림’.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 끌림은 도대체 무엇에 의해 생겨나는 걸까.
“물리적인 거리가 뭐 중요하겠어?”
헤어짐 앞에서 나 스스로 이렇게 말해보지만, 감정은 두부처럼 잘라내거나 붙일 수가 없더라. 학교를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참 우습다. 나와의 이별 앞에서 눈물 지어줄 사람은 있을까, 궁금했다.
“저희 볼 수 있는 거죠?”
한 후배가 내 교실까지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나도 울컥했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이곳에서 맞이했던 모든 감정과 인연들.
나는 안다. 이 모든 순간이 내 마음속에 ‘인연의 씨앗’이 될 것을.
내일이면 이 학교를 떠난다. 오늘 밤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집에 들렀다.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 편안한 그곳.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온돌 침대에 몸을 눕히자, 그동안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눈앞에 스쳤다.
연구실에서 커피를 내리며 “맛있다”라고 말했던 순간, 현장 체험학습지에서 나눈 대화, 마스크를 벗고 처음 마주했을 때의 두근거림, 매일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하던 시간. 기억의 노트 속 시간이 하나둘 이어졌다. 이런 순간들은, 마음 한편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과거는 아름답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래서 헤어진 사람과의 일을 회상할 때면, 늘 후회가 따른다. 아버지를 보내고 난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마찬가지다. 분명 언짢거나 속상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기억은 부정적인 것들을 지워버리는 모양이다. 그래서 과거 속 사람들에게는 늘 미안함과 후회가 남는다.
‘더 잘해줄걸.’
‘고맙다는 말을 더 자주 할걸.’
하지만 이런 마음은 오직 헤어지는 사람에게만 가지면 된다. 나는 죽음 외에는 진정한 ‘헤어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날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서로 살아있다면 결국 만나게 된다. 마음의 거리는 결국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욕심을 부려본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고.
나는 올해도 누군가와 헤어진다. 매년 그랬듯이. 그리고 새로운 학교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설레는 일이다. 낯선 건물, 교무실, 교실— 처음 보는 아이들과 새로운 1년이 시작된다.
후배의 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전입할 학교에 도착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학교가 8년 전 내가 근무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때의 기억과 추억이 되살아났다. 어색함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곳.
만남과 헤어짐의 여운을 동시에 품은 채, 이제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것이다.
삶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어릴 적에는 몰랐다. 노력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우주의 조화’(?)에 의해 흘러가는 걸까.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만남’에서 설렘을 느끼고, ‘헤어짐’에는 ‘인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각자에게 어울리는 내 마음의 방으로 초대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상대방과 나 사이 인연의 색도 자연스레 정해진다. 감사하게도.
헤어짐 앞에서 나는 나와 상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본다. 지금의 인연,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시간까지. 잠시의 이별이 시리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과정이라면 받아들인다.
‘인연은 시간이 그 색을 칠해줄 테니까.’
매 순간, 매년 누군가와 헤어지더라도,
그 시간을 기대와 설렘으로 채운다.
내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