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by Me

by GIMIN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역에 내렸을 때는 비가 내렸다. 나는 빗줄기 사이로 구름이 흐르는 흐린 하늘을 보며 에노시마[江の島]에 다녀오고 나서도 걷히지 않는 먹장구름을 원망했다.


입구를 빠져나오니 횡단보도 옆에 고인 웅덩이가 떨어지는 빗물에 일렁거렸고, 우비를 쓴 사람 한 명이 나를 지나쳐서 저 멀리 거리로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가고자 했던 음반점은 길 건너편에 바로 있는 빌딩에 있었다.


LP 슬리브의 쿰쿰한 냄새가 사람을 반기는 동안 나는 젖은 우산을 비닐 안에 집어넣으며 앨범을 살폈다. 빠른 손길로 록 앨범 LP를 넘기는 사람과 레게 CD 사이에서 망설이던 나는 결국 CD 한 장만을 고른 채 얼른 계산에 임했다.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히지리바시[聖橋]라는 다리가 눈에 띄었다. 불만족이 나로 하여금 아키하바라[秋葉]까지 걷게끔 충동질했다. 나는 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건너는 와중에 공자 사당이라고 알려진 곳을 스쳐 지나갔다. 레인 코트를 입은 여자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스쳐 지나갔고, 바닥은 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검은 물에 짓이겼다. 여자가 지나가고 나서야 가방에서 호기롭게 DSLR을 들고 다닌 나는 셔터음이 내는 소리에도 신경을 써가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모두 흔들렸다.


칸다 신사[神田神社]에 토리이[鳥居]를 찍었을 때, 나는 문득 아사쿠사[浅草] 외에는 사원 같은 데 들른 일이 없다는 생각과 후배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 신사 이야기를 했던 걸 들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는 그냥 사진이나 몇 장 건지자는 심정으로 그쪽으로 갔다.


기원이나 축원, 부적이나 새전 같은 행위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당장 그 옆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나마 좀 나은 듯 싶었다. 이제 비는 오지 않았지만, 추위로 인한 한기가 온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듯싶었다. 나는 곧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키하바라[秋葉]는 내가 생각했던 범위보다 더욱 축소된 듯싶었다. 심정적으로 느낀 게 아니라, 정말 애니 굿즈를 취급하는 건물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내가 들르는 아키하바라[秋葉]는 오직 아키하바라[秋葉] 북오프 정도로 축소되었던 듯하다.


나는 굿즈샵 바로 옆에 생긴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생각해 보니 일본 와서 처음 먹는 햄버거였다. 멜론 소다와 감자튀김, 햄버거라는 조합이었지만, 걷다 보니 조금 지치는 감이 있어서 금세 해치웠다.


다시 비는 내리고 나는 우산을 쓴 채로 아키하바라[秋葉] 역으로 갔다. 신주쿠[新宿]까지 가는 역 플랫폼에서 나는 괜히 혼자 나왔다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산 음반이 짐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그때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밀크 스탠드라고 써져 있는 간판 밑에 여러 개의 우유병이 놓여있었다. 병우유를 파는 곳에서 나는 과일우유를 하나 사 마셨다.


단 맛이 감도는 과일우유를 먹으면서 우울한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에노시마[江の島]에 다녀온 아쉬움을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계속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날이 좋은 날일 수는 없는데, 나는 그저 생떼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살폈다. 잘 찍은 사진도 있고 못 찍은 사진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이 똑같은 사진으로 남겨졌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지금까지 생각한 우울한 감정이 천천히 풀어졌다. 신주쿠[新宿] 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타면서, 나는 헤드폰 안에서 흐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몇 달 있다가 나는 우유가 지닌 성분이 우울함을 줄여준다는 기사를 봤다. 내 본능이 나로 하여금 우유를 찾게 만든 건지, 내가 그저 먹기만 하면 성격이 좋아지는 건지를 한참 고민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비에 젖은 패딩이 준 추위는 점점 사그라들고, 그날 걸어 다녔던 풍경이 서서히 일어나는 중이었으니까.


고생이 추억으로 완전히 넘어간 지금에도, 한 잔의 우유가 내 마음을 위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련다. 그러나 그날 편의점에서 또다시 사 먹은 과일 우유는 그때의 맛이 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맛본 과일 우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로의 순간은 그렇게 사라졌지만, 단맛과 더불어 마음을 지탱한 그날의 우유는 지금도 기억 저편에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삶의 무게가 습기를 머금은 채로 내 몸 위를 짓누를 때마다 나는 그날 마셨던 차고 달콤한 과일 우유 한 잔을 떠올린다.(202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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