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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i Spice』

PART 9. 4-9-18

by GIMIN

세련미 넘치는 멜로디와 환상적인 이미지로 위선을 조소하고 풍자한 이 앨범의 수록곡은 훗날 나올 2집의 몇몇 수록곡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2집엔 주로 개인적인 상념(과 성찰)을 서정적인 정조에 담은 곡이 들어갔다. 이 앨범엔 주로 날카로운 ‘코멘트’가 세련미 넘치는 멜로디에 실린 곡이 들어갔다. 앨범의 마지막 곡이자 숨은 명곡인 「사수자리」는 환상적인 상상력이나 유려한 멜로디로 에고이즘에 빠진 사람을 참신하게 풍자했다.


이 앨범은 김민규와 윤준호가 공동 보컬의 역할을 수행한 앨범이었다. 김민규가 (비교적 서정적인 어프로치의) 리드 보컬을 맡은 곡에서는 윤준호가 코러스를 맡았고, 윤준호가 (비교적 시니컬한 어프로치의) 리드 보컬을 맡은 곡에서는 김민규가 코러스를 맡았다. 이와 같은 보컬 포지션에서도 드러나듯, 이 앨범의 ‘서정’과 ‘조소’는 결국 별개가 아니었다.


이승기의 신디사이저 연주와 오인록의 강한 드럼 연주를 바탕삼은 (톤을 위시한) 기타 연주가 인트로를 꽉 채운 (간주의 기타 연주 또한 충만한) 「노 캐리어」와, 윤준호의 바지런한 베이스 연주가 곡의 성격을 더욱 강조한 「가면」은 기실 이 앨범의 ‘방향키’를 잡고 있다. 이 앨범은 이 두 곡을 거쳐야 (바로 뒤에 나오는) 「챠우챠우 -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이하 「차우차우」)」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러나 거의 한 두 줄만 남기고 모든 말을 없앤 「차우차우」의 말은, 이들이 구현한 사운드로 인해 (이들이 처음 모였던 가상의 ‘공간’에 퍼지는 ‘정보’처럼) 퍽 다양한 ‘해석’이 붙었다. 이 곡의 ‘조소’는 그에 맞춰 표변하여 ‘송가’의 이디엄을 획득하고, 어느새 ‘사랑 노래’로 읽히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적극 머금은 팝의 범용성 덕분에, 이 ‘곡해’ 또한 또 다른 이해 방식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이 앨범의 음악이 이 앨범의 말을 초월하는 힘을 지녔던 덕분에 이런 ‘마법’이 가능했다.


「노 캐리어」는 제목에 들어간 'No Carrier'*의 의미를 모르는 지금의 청자에게도 (적어도 곡의 의미 자체는) 쉽게 어필할 수 있다. 이 곡의 세련미 있는 멜로디에 선명한 조소와 단절이 분명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윤준호의 시니컬한 보컬은 바로 이러한 ‘단절’을 분명한 목소리로 표현했다.) 「저승 탐방기」의 환상적인 ‘지옥도’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산울림의 영향이 짙은) 「투명인간」과, (일렉트로니카의 성격이 짙은) 「누가」의 조소 또한 팝을 머금은 멜로디 덕분에 지금도 날카로운 ‘재치’를 뽐낸다. (이 앨범의 숨은 보석인) 「기쁨이 들리지 않는 거리」는 지금도 사뭇 선명한 서정적인 정조를 자아낸다. (인상적인 기타 연주가 깃든) 「콘 후레이크」에 들리는 후줄근한 ‘백수’의 일상은 훗날 무수히 등장할 홍대 앞 뮤지션 집단이 구현한 ‘백수’의 일상을 먼저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적어도 이 앨범을 만들 당시의 밴드는 자신들의 신념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눈치 보지 않았다. 이들은 이들의 솔직한 주관을 주저하지 않고 이 앨범에 ‘곧장’ 투영했다. 바로 그 주저하지 않는 태도가 (포용력이 넓은) 이 앨범을 소위 ‘첨단 앨범’으로 만들었다. 통념이 아닌 신념을 선택한 이들의 대범함과 유연함이 총천연색으로 펼쳐진 이 앨범은 오늘날의 청자 또한 포섭할 수 있는 저력을 지금도 발휘한다. 게다가 이 ‘저력’으로 인해 이들의 음악에 감 놔라 배 놔라 했던 여러 ‘꼰대들’ 또한 더불어 길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여튼 꼰대들, 꼴좋다.


* 본래 이 단어는 PC 통신의 모뎀(MODEM) 쪽에서 ‘이용자가 많아 접속할 회선이 없음’을 이용자에게 통보할 때 쓰던 축약어였다. ‘접속하신 사이트는 허용접속량을 초과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의 ‘사이트 접속 불가’를 ‘인터넷 접속 불가’로 바꿔서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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