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33-19-17
「여인#3」의 가사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부르는 한영애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당대에나 지금이나) ‘여인’이라는 천형을 짊어진 사람의 고단함을 쉰 목소리로 표현한 그이의 목소리는 갈망과 번민 사이를 헤맨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드럼을 맡았고) 이 앨범 전체의 드럼 연주를 맡은 김희현의 퍼커션 연주는 (신디사이저 연주가 깔린) 이 곡의 독특한 울림을 되레 강화했다. 이 앨범에서 유이하게 현악 연주가 들어간 유재하 작곡의 「비애」 또한 한영애의 보컬(과 절규)로 인해 해당 곡의 성격을 홀연히 벗어던졌다. 이 앨범에서 상대적으로 얌전한 성격을 지닌 「호호호」에서도 (앨범의 첫 곡인 「거기 없소」부터 비범했던) 그이의 보컬은 기존의 ‘모든’ 가수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원초적인 에너지로 가득했다.
한영애의 솔직하고 직관적인 보컬은 이 앨범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만개했다. 「달」의 대범한 어프로치와 「코뿔소」의 자신감 넘치는 에너지를 그이는 ‘조절’해서 노래 부르지 않았다. 「달」에서 구음(口音)까지 소화하는 그이의 목소리와 「코뿔소」의 의성어에 선명한 악센트를 넣는 그이의 목소리는 대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하ᆞ간돌이 작곡한) 「갈증」을 부르는 한영애의 목소리는 정말 목이 마른 것 같이 들리고, 「코뿔소」의 마지막에서 누운 코뿔소를 향해 일어나라고 말하는 그이의 목소리는 정말로 코뿔소를 안쓰럽게 여기는 듯이 들린다. (「여인#3」에서 ‘착하게’ 왕자님을 기다린다는 그이의 목소리 또한 간절하게 들린다.) 그이는 한계가 있으면 (불필요한 장식 없이) 한계가 있는 대로 부르고, 자유로운 대목에선 한없이 자유롭게 불렀다. 비참함과 갈증과 고독을 그이는 (연극적인 어프로치에 실은) 자신의 에너지와 사랑과 의지로 표현했다. 「루씰」의 블루스가 그이의 목소리를 통해 숨은 매력을 발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이는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몸에서 솟은 노래를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전신(全身)을 온전히 ‘블루지’에 던졌다.
그이는 또한 이 앨범에서 (프로듀서인) 송홍섭과 김수철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비전(Vision)을 제대로 밀어붙였다. 그이는 이 앨범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여러 작곡가의 곡을 비롯한) 여러 ‘장인’들을 불렀다.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박청귀가 이 앨범의 기타 연주를 거의 다 전담했다. 김희현 또한 자신의 강력한 드럼 연주를 이 앨범에 실었다. (주로 신디사이저를 맡은) 황수권과 (하몬드 오르간 연주를 맡은) 김효국이 이 앨범의 건반악기 연주를 맡았다.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송홍섭 또한 이 앨범의 베이스 연주를 직접 담당했다. 9인조로 이뤄진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현악 세션 또한 한영애의 본능적인 비애와 사랑을 뒷받침했다. 엄인호, 이영재, 최진영이 각각 한 곡씩 기타 솔로를 연주하며 이 앨범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이문세의 4집과 5집을 레코딩했던 베테랑 엔지니어인 최병철이 레코딩을 담당한 이 ‘한 마당’은 김수철이 써준 ‘대곡’인 「바라본다」에서 한영애의 목소리와 (김현식, 전인권을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의 코러스와) 더불어 폭발했다. 체념으로 얼룩진 목소리로 외로움을 설파했던 「거기 없소」에서, 다짐의 쉰 목소리를 강조한 「바라본다」까지 이 앨범은 청자에게 남김없이 들려줬다. 당대에 여성 보컬이 지녔던 고정관념을 쾌히 부쉈던 이 앨범은 우리 자신이 본래 고독하기에 더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그이의 고독이 깊기에, 그이의 사랑 또한 이토록 깊은 것이리라. 구속의 사랑이 아닌 자유의 사랑을 갈망하는 ‘갈증’이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한, 이 앨범은 고유한 목소리를 잃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