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14-13-16
이 앨범은 결국 김현식의 앨범이다. 장기호의 베이스 연주가 이 앨범 전체의 사운드를 묵직하게 잡아도, 박성식의 피아노 연주가 이 앨범의 사운드에 서정을 부여해도, 김종진의 기타 연주가 이 앨범의 모든 곡에 다채로운 성격을 입혀도, 전태관의 안정적인 드럼 연주가 전체 앨범 사운드를 든든히 받쳤어도 소용없다. 김현식은 이들의 신묘한 기재(奇才)에 눌리지 않았다. 도리어 김현식은 이들의 기운을 받아 말 그대로 환골탈태했다. 「우리 이제」나 「슬퍼하지 말아요」와 같은 곡에서 김현식의 기량은 여전히 굳건했다. 멤버들의 협업에 힘입어 한계를 돌파하며 용솟음치는 (그래서인지 이 앨범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가 직접 하모니카를 분 「우리 이제」의 하모니카 연주는 그의 보컬 ‘연습’처럼 들린다.) 그는 ‘비’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이 앨범의 다채로운 사운드를 훌륭한 보컬로 채웠다.
물론 이 앨범은 김현식이 자신의 밴드 멤버들과 긴밀하게 소통한 앨범이기도 했다. 그는 밴드 멤버가 쓴 곡을 단순히 취합만 해서 부르지 않았다. 그는 멤버가 만든 곡의 성격과 무드를 흡수하여 자신의 보컬 표현을 더욱 갈고닦았다. 그렇게 갈고닦은 보컬로 그는 멤버들의 곡을 더욱 풍성하게 채웠다. 유재하가 작곡한 「가리워진 길」을 부를 때, 그는 자신의 고유한 파워 넘치는 보컬을 어필하는 대신, 곡의 멜로디를 강조하는 보컬을 구사했다. 김종진이 작곡한 「쓸쓸한 오후」를 부르는 그의 보컬은 재즈의 필링으로 충만하다. 「그대와 단둘이서」를 부르는 김현식의 보컬은 세심한 감미로움으로 가득하다. 박성식이 작곡한 「비처럼 음악처럼」을 다이나믹하게 (그러나 되도록 힘을 빼고) 부르는 그의 보컬은 결과적으로 청자의 가슴속에 오래 지워지지 않을 여운을 진하게 남겼다. 게다가 이 앨범은 전작에서 도드라진 김현식 보컬의 ‘장점’을 분명히 계승했다. 앨범 첫머리에 있는 「빗속의 연가」는 (「비오는 어느저녁」의 ‘블루스’ 또한 마찬가지로) 전작의 「사랑했어요」를 분명히 이어받은 곡이었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이렇게 이어받은 김현식의 ‘장점’을 훨씬 더 제련했다. 「비오는 어느저녁」에서 들리는 김종진의 기타 연주는 해당 곡이 머금은 블루스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했다. 「빗속의 연가」를 연주하는 장기호의 베이스 연주와 박성식의 키보드 연주는, 해당 곡에 깃든 비애에 세련미를 더했다. (김현식이 1집에서 발표했던) 「떠나가 버렸네」를 연주하는 박성식의 키보드 연주와 전태관의 드럼 연주는 해당 곡이 진작 획득했어야 할 무드와 다이내믹함을 동시에 챙겼다. 이 앨범에 이르러 마침내 「떠나가 버렸네」는 만개할 수 있었다.
이 앨범의 가장 훌륭한 곡인 「눈 내리는 겨울밤」은 이 앨범이 밴드의 앨범이라는 점을 청자에게 진하게 어필했다. 장기호의 묵직한 베이스 연주와 김종진의 테크니컬한 기타 연주, 전태관의 정확하고 파워풀한 드러밍과 박성식의 탄탄한 건반 연주가 김현식의 거침없는 목소리와 더불어 충만한 이 곡은, 자신의 음악을 마침내 ‘획득’했다는 김현식의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전작이 김현식의 무시무시한 음악적 내공을 증명한 앨범이었다면, 이 앨범은 김현식이란 뮤지션의 한계를 깨부순 앨범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김현식 보컬의 가장 좋은 순간이 「우리 이제」와 같은 곡(과 하모니카 연주)에도 스며든 이 앨범을 통해, 그는 마침내 음악적으로 자유로워졌다. 이 앨범에서 김현식은 비로소 가객(歌客)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