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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일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에서 세 시 사이

by GIMIN

벚꽃 잎 사이사이에 피어난 잎들이 바람 끝을 살며시 매만졌다. 이맘때는 그림자도 검푸른 빛을 띠었다. 굳건한 건물의 그림자는 길바닥에 그들의 푸른 천 같은 실루엣을 던졌다.


나무 그림자는 그보다는 좀 더 푸른빛을 많이 띠었다. 나무에서 꽃에서 벗어난 벚꽃 잎이 수도 없이 공중에서 뒤채며 천천히 내려왔다. 때마침 트럭이나 오토바이가 편의점 앞을 지나갔다. 멜빵바지를 입은 꼬마가 편의점 앞에서 자기 눈높이에 있는 과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편의점 옆에서 분식점을 하는 아줌마는 내가 갈 때마다 항상 편의점에 있었는데, 늘 일회용 커피 컵을 손에 들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면 원두가 살짝 탄 듯한 커피 냄새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가는 점점 진한 오렌지 빛으로 물들었다. 거리에 깔린 빛이 더욱 노랗게 익는 속도는 개미가 운동장 전체를 기어가는데 걸리는 속도와 비슷한 듯 느껴지지만, 잠시 방심하다 황급히 다시 살피면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두운 길 위에 가로등 불빛이 찰칵 켜지곤 했다.


민들레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자신의 테두리를 끊임없이 흐릿하게 만들 때마다 나는 이 꽃이 언젠가 하얀 꽃씨를 흩날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코를 만졌다. 코 안으로 다시금 새로운 냄새가 온다. 벚꽃 냄새는 아스팔트 냄새와 먼지 냄새의 끝자락에서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벚꽃 냄새를 가리는 일은 내게 마치 이름도 나이도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내가 옛날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의 턱 선을 기억하는 일과 같았다. 턱선은 다부지지도 흐물거리지도 않은 선을 그리지만, 제대로 알아보려면 그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봐야 하니까. 의사나 형사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같은 직업적 사명감이나 그 연장선상에서 얼굴을 살피는 게 아닌 이상,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대상의 얼굴에 있는 턱선을 자세히 볼 수 있으니까.


느낌은 휘발성이 강해서, 시간이 지났다는 자각이 한바탕 기억을 휩쓸고 지나가면, 그림자는 온전한 빛을 숨기고, 턱선도 그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잊힌다. 바람결에 책을 놔두면 책이 여러 장 넘어가듯이 기억이 다음 챕터로 넘어가 새로운 기억을 작성한다. 그렇게 느낌은 과거가 되고 내가 알던 냄새는 어느새 기억에서 희미하게 윤곽선으로만 특정할 수 있다. 얼굴이나 모습은 기억나지 않고 턱선이 고왔다는 문장만 기억한다.


오후 두 시는 햇살이 세계의 윤곽선을 부드럽고 산뜻하게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세상은 밝은 노란색과 어두운 푸른색이 만든 대비로 한층 돋보였다. 구름이 느리지만 수더분한 움직임을 흩어질 때, 햇살은 특유의 샛노란 펜촉을 기어이 벽이나 바닥 심지어 파리 날개 위에까지 대며 자신의 서명을 뚜렷한 필체로 남겼다.


멀리 새로 지은 아파트들 또한 안 그래도 구름 몇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한층 뚜렷한 윤곽선을 띠었다.


아직 잘리지 않은 시든 나무들은 마치 노란 더께를 뒤집어쓴 것처럼 잎의 색을 일견 잃어버린 듯했지만 또한 마지막 힘을 다해 특유의 짙은 초록색 그늘을 드리웠다.


햇살을 받은 단풍나무 잎은 잎맥까지 훤히 헤아릴 수 있었다. 벌써 붉어질 때가 된 것일까. 단풍잎 끝을 스쳐가며 사선으로 혹은 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햇살이 단풍나무의 가장 그럴듯한 예언처럼 굳건해 보였다. 단풍나무 그늘 속에서 나는 다시 화단 쪽을 봤다. 앞산에서 내려온 듯한 산비둘기 두어 마리가 길 위에 있었다.


산비둘기 날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날개는 몸통 옆에 그려진 무늬 같았다. 실상은 깃털의 끝자락이 가지런하고도 날렵한 것이겠지. 꼬리털 쪽일수록 붉은빛을 띠고 배 쪽으로 갈수록 누런빛을 띠었다.


벽돌 사이로 빠져나온 종이가 바람에 흩날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벽돌과 쓰레기를 쌓아 놓은 자리 옆에서 비둘기들이 놀라서 하늘로 달아났다. 물 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편의점을 나왔다. 종이는 새들의 날개가 친 바람을 어쩌지 못한 채 땅에 내려와 엎어졌다. 바람이 불고 가볍게 먼지가 일었다. 흙먼지를 머금은 물줄기는 마치 이리저리 망설이다 도망가는 쥐처럼, 웅덩이를 만드는 가 싶더니, 이내 낮은 길로 접어들었다.


하수구 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오후 세 시였다.(202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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