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물건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언덕길에서 뭔가 데구루루 굴러와 내 발 끝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허리를 굽힌 채 자세히 살폈다. 떡갈나무 빛깔을 그대로 빼닮은 도토리 한 알이었다. 중학교 다녔을 때, 중학교에 있던 커다란 떡갈나무에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가을이면 펴진 책 한가운데로 도토리가 한두 알 떨어져서 끼워졌으니까.
회색 장막 같던 구름도 사라지고 하늘엔 커다란 빗자루로 채 쓸어 담지 못한 구름이 푸른 하늘에 얇게 펼쳐져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 고비를 넘은 사람처럼 한 숨을 푹 쉬었다. 한 숨은 서늘한 바람을 만나 공중에서 뒹구는 동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아줌마의 무릎에 두 손을 올리고 혀를 내민다. 강아지의 목줄을 쥔 주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강아지와 아줌마를 번갈아보면서 사과의 말을 건넨다. 아줌마는 괜히 손사래를 치며 두 손에 움켜쥔 비닐을 들고 들어간다. 밑 부분의 그림자가 제법 깊은 검정 비닐봉지는 안 그래도 팽팽하던 손잡이 부분이 제법 팽팽하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마자 찬 공기가 천천히 밀려온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푸른 채반을 만났다. 너부데데한 푸른 채반 위에 꼭지를 딴 홍고추가 말라갔다. 이 맘 때면 아파트 주차장은 대규모 건조장으로 바뀐다. 오이나 호박이나 여주를 말리는 돗자리 옆에서 도토리 마르는 돗자리가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붙어있었다.
동네 슈퍼에는 벌써 가판대를 정리하고, 몇 개의 상자가 주인의 발치에 있었다. 상자를 쌓아 올리는 아저씨는 햇볕에 탄 얼굴로 땀을 닦으며 상자를 올렸다. 계산대에서 주인의 아내가 종이에 가격표를 작성했다. 마카를 든 그이의 손에 하얀 목장갑이 있었다. 채소 코너에 어느덧 끝이 타지 않는 종류의 대파가 들어왔다. 나는 아이스크림 옆에 스티로폼 상자 안에 든 매생이가 들어오지 않았나 싶어 기웃기웃거렸다. 스티로폼 상자는 없고, 대신 잘 익은 호박 한 덩이가 있었다.
역으로 가는 길에 공원이 있었다. 대리석 사이로 튀어나오던 물줄기가 온 사방에 물과 무지개를 흩날렸다. 이제는 그 자리에 줄이 처졌다. ‘수리 중’이라는 간단한 안내문구가 써진 종이가 줄에 붙었다. 그나마 밑 부분이 찢긴 종이였다.
아직 모기가 기승을 부려서 에프 킬라를 사려고 집을 나왔다. 쉰다는 문구를 붙인 가게는 아직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역 앞의 채소가게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시장은 기름 익는 냄새가 노란 손으로 모든 비린내를 때려잡았고, 방앗간에서 풍기는 고춧가루 냄새 때문에 잠시 기침했다. 때마침 집에 다진 마늘이 떨어진 차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행스럽게도 방앗간은 카드를 받았다.
손에 묻은 마늘 냄새를 걱정하면서 다시 집으로 갔다. 어제까지 내가 몰두한 서류는 어제부로 끝났다. 서류가 남의 손에 들어간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 괜스레 두 팔을 이리저리 놀린다. 아직 두 손을 머리 위로 무리 없이 지체 없이 올릴 수 있다. 틈틈이 맨손 체조나 스트레칭을 해둬서 다행이었다. 열흘 동안 잠이나 실컷 잘까. 아니면 부모님을 모시고 맛집이나 갈까. 프로젝트에 지친 나는 작은 계획에도 머리가 무겁다. 들어가기 전에 집 앞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경비 아저씨가 낙엽을 쓰는 동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애 두엇이, 오늘 나온 급식이 맛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갔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목 부분을 팔로 살짝 압박했다. 압박받은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 팔을 풀었다. 두 아이가 웃으면서 달렸다. 아파트 벽에 울린 웃음소리가 제법 깊었다. 저 멀리서 두 아이가 허리를 숙인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낙엽 쓰는 일을 마친 경비 아저씨가 경비실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모자를 벗어 책상 위에 던졌다.
아저씨는 잠시 눈을 붙이고, 벤치에 앉은 채로 잠시 하늘을 본 나는 지금 들고 있는 마늘이 상하지는 않겠구나 싶어서 괜히 한숨을 지었다. 바람이 불고 터진 은행 열매 냄새가 진동하는 도로를 붉은색 스포츠카가 지나갔다. 베이스 소리가 묵직한 댄스 음악을 튼 채로 지나갔다. 음악 소리가 사라지며 잦아질 무렵에서야, 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메우겠다는 듯이 공중으로 마구 쏟아졌다.
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돗자리에 있는 도토리를 보면서 까마귀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나는 괜스레 피식 웃으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2024.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