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명함 주고받을 일이 종종 있다.
주로 현장에서, 현장 사람끼리 한다.
이때 현장이라 함은 '사회복지 현장'을 의미하며 또 이때 현장 '사람'이라 하면
'사회복지사' 또는 이쪽 일을 하는 공무원, 연구자, 자유활동가 같은 이를 지칭한다.
경력이 아주 짧다 할 순 없는 탓에 그간 서랍 한편에 쌓아놓은 명함만 해도 백몇 장은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끼리 주고받는 명함에는 별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해요, 같은 상투적인 말?
저는 어느 부서에서 일합니다, 같은 더 상투적인 말?
또는 오, 여기는 명함에 후원 계좌를 크게 넣었네요.
종이 질이 좋네. 근사하네, 같은 생뚱맞은 명함 디자인 칭찬? 아무튼, 대충 이렇다.
그런데, 우리끼리 말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 자기소개해야 하는 때,
"저, 이런 일 하고 있습니다." 하며 마주 앉은 사람에게 명함을 꺼내 건넬 때,
그리고 그쪽 명함을 건네받을 때, 그때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어디(주로 회사 이름)에 다니시는군요.
또는 어떤 일(주로 직업)을 하시나 봐요.
그런데 마주 앉은 사람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꼭 하는 말이 있다.
"사회복지사? 장애인복지관이요? 와, 좋은 일 하시네요."
이 말은 그간 수십 수백 번은 들어왔던 말임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래서 매번 삐거덕 댄다.
괜히 겸연쩍고 민망해서 "아, 네." "그런가요?" 하고 마는데
말 뒤엔 괜히 허허, 하며 텅 빈 웃음이 꼭 따라붙는다.
이때 웃음은 자음으로 표기하면 'ㅎ'이다. ㅎㅎ, 또는 ㅎㅎㅎ.
그 유명한 공기 반, 소리 반, 으로 눈과 입을 십분 활용하여 웃는 기술인데,
이걸 십 년 넘게 하다 보니 나름대로 볼 만하다 싶을 만큼은 한다.
사실 여기까진 뭐, 그래도 괜찮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기에서 한 발 아주 크게 걸어 들어 와선 또 이렇게 묻는다.
"그런 데는 좋은 사람만 있겠어요. 천사 같은 사람이요."
"조직 생활하는 데는 어렵지 않겠네요. 서로 양보하고…, 싸울 일도 없을 것 같고…."
거짓말 않고, 이런 류의 말을 그간 꽤 여러 번 들어봤다.
천사? 전사 말고 천사? 진심으로?
경험치 부족으로 이와 같은 말에 나는 'ㅎ'이 아닌 'ㅋ'이 툭 튀어나와 버린다.
아주 진한 ㅋ, 궁서체에 굵은 글씨, 크기는 한 20?
짧은 한숨,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알려준다.
"글쎄요, 다 사람 사는 곳인 걸요."
처음 현장에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싫어하는 말이 딱 두 개 있었다.
이는 일종의 버튼과도 같았으며, 듣는 순간 "아니에욧!" 하며 괜히 버럭 하곤 했다.
첫째, "학생이야?"
나는 꾸밈에 큰 관심이 없고, 잘할 마음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정말 대충 하고 다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일까? 나이가 꽤 들어서도 위와 같은 말을 곧잘 듣고 있다.
좋게 표현하면 수수하다, 정도이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옷 좀 사 입어라." 같은 상태라고 이해하면 된다.
지금은 "학생이야?" 또는 "이제 막 학교 졸업하고 왔나, 했어." 같은 말에
"저요? 생각보다 나이 적지 않아요." 하고 넘어가는 반면, 어릴 때는 정말 듣기 싫고 들을 때마다 짜증 나고,
그래서 조금 날을 세워 맞대응했다.
그때부터 십 년 넘게 의식처럼 하는 출근 루틴이 하나 있다. 바로 '사원증 걸기'이다.
근무시작과 함께 척, 사원증을 목에 걸고, 관복(주로 조끼)을 입고 지퍼를 명치 부근까지 깔끔히 올린 다음,
사원증이 옷 안에 들어가지 않게 잘 보이도록 꺼내 놓는다.
이게 뭔 루틴이냐, 할 사람도 있겠으나 사원증 걸고 조끼 입는 게 영 불편하다 하는 사람도 많고,
몸에 익숙지 않아 자꾸 잊어 먹는 동료, 후배도 꽤 있다.
나에게는 이 두 가지가 매일 아침 출근 루틴이며 하나의 '의식'같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목에 척 거는 순간, 지퍼를 착 올리는 순간, 그때부턴 출근 모드 스위치 온.
여덟아홉 시간은 사회사업가 얼굴과 목소리,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 자기 할 일, 할 몫, 할 도리 하며 산다.
퇴근하면 스위치 오프, 이때 사원증과 조끼를 벗어 한쪽에 잘 둔다.
안녕,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또 보자.
가끔은 사원증을 목에 건 채 집에 간 적도 더러 있었는데 꼭 집에 다 와서,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고서야 아차, 한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일 시작했던 초반에만 하더라도 자주 그랬다.
애사심, 이런 건 아니고요. 정신이 없어 그런 겁니다.
아무튼, 그때 나는 '학생'이란 말을 왜 그렇게 싫어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괜한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회복지사' 이름을 얻기 위해 대학 사 년간 부지런히 공부했고,
그래서 꽤 높은 성적을 유지했고,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썼고,
두 번의 현장 실습을 했고, '보건복지부 장관' 도장이 찍힌 국가 자격증이 있는 자칭 '전문가'인데.
학생이요? 이 일을 어떻게 학생 같은 '비전문가'가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일이 쉬워 보입니까? 뭐, 이렇게 아주 되도 않는 반발심이 든 것이었다.
원래, 빈 깡통이 요란하고 뭣도 없는 게 더 까분다 했다.
빈 깡통에, 성격을 관장하는 어느 부위가 매우 찌그러져 있으며,
뭣도 없던 어린 나는 꼴에 '전문가' 소리를 듣고 싶어 그렇게 난리를 쳤던 것 같다.
지금은 뭐, 위에 쓴 바와 같이 "학생이요? 고맙습니다." 하고 만다.
우리 일과 업에 대한 자긍심은 여전하나, '전문가'라는 말에 반은 긍정, 반은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하는 '사회사업'은 그냥, 대충, 아무나, 아무렇게,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또 그렇게 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천 바탕이 되는 생각과 이념, 이론과 사례를 충분히 알아야 하고,
이를 자기 실천으로 녹여내야 하며, 그래서 나는 더더욱 부지런히 읽고 쓰고 공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만나 뵙는 여러 당사자 앞에 나는 '전문가'란 말을 쉬이 쓰진 않는다.
진짜 '전문가'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사업 하는 나는, 한 사람과 가족, 지역사회가 자기 삶을 살고, 서로 어울려 살고,
그 가운데 크고 작은 기쁨을 이루고 누리도록 '돕는' 데에 한정하여 '전문가'이다.
그래서 나는 당사자와 관계를 맺어감에 있어 처음부터 이렇게 영역을 나누어 놓고,
"그래서 우리 각자 자기 영역에서 자기 일 잘해봅시다!"라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해놓고 나니 굳이 "학생이야?" 같은 말에 난리 치고말고 할 이유가 없다.
요즘에는 살짝 즐기기도 한다.
"몇 살이에요?"같은 묻는 질문에는 "몇 살처럼 보이세요?"라고 눈을 반짝이며(기대에 차서) 되물을 만큼
아주 능구렁이가 다 됐다.
두 번째 버튼은 앞서 설명했던 바로 그 말, '좋은 일' 하시네요, 이다.
의미와 의도에 대해서는 물론, 당연히 안다.
그럼에도 아닌 건 아니기에, 글쎄, 그런가요?라고 한다.
이런 나를 나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좋은 일? 맞다. 하지만 '좋은'이란 말은 사람에 따라,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는 분명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었고,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었는데
다른 사람 처지에선 전혀 원치 않는 간섭, 참견,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싶은 오지랖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꽤 좋은 의도, 의미로서 했던 일이 한참 지나 보니 정말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모금.
방송, 신문, 온라인 매체 등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방법으로 모금하면
큰돈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수 있다.
때문에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이와 같은 접근이
조금 과장하면 '살고 죽고'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큰돈과 빠른 지원으로 '살긴 살았는데' 그다음부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기도 하다.
이전에 담당했던 한 가정의 일이 그렇다.
그 가정은 부모 모두 중증 장애와 희귀 질환으로 형편이 넉넉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살고 있던 집을 비워줘야 했던 탓에 큰돈을 빨리 마련해야 했다.
정말 길바닥에 '나 앉을 위기'였었기에, 두 분은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누가 신청했고 어느 방송에서, 어떤 과정으로 도움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당시 부부는 두 딸과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방송 모금을 허락했고
그 덕에 작은 임대 아파트 한 칸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다음 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그 집 큰딸은 학교에서 심한 괴롭힘을 겪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들어가서조차 따돌림은 계속 됐다 한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가난해서, 부모가 장애가 있고 희귀 질환이고, 그리고 그 모습이 방송에 나왔기에. 그게 놀림과 괴롭힘, 따돌림의 이유였다.
수년간 이어지던 괴롭힘에 큰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방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불면, 폭식, 우울, 점점 자기 안으로만 파고드는 생각, 환청과 망상.
살 긴 살았으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그 집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눈물짓곤 했다.
좋은 마음, 좋은 의도였고, 그 믿음으로 했던 일의 결말은
때론 예상치 못한 슬픔, 아픔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때 좋은 일이, 줄곧 좋은 일은 아닐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 또한 지난 십 년 간, 이와 같은 일을 수도 없이 겪어왔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의도로서 쓴 글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 하는 일을 무조건 좋은, 착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이란 말의 의미를 놓고 나름대로 정의 내려보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어스름하게 알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면 아무것도 만져지는 게 없는,
너무 중구난방, 여기저기 널려 있는 탓에 한 곳에 착착 정리하기 어려운,
나에게는 '좋은'이란 말이 딱 그렇다.
그래서 '좋은 일' 하시네요, 같은 말에 확신을 갖고 "네, 그럼요. 아주 좋은 일이지요."라고 하는 대신
어물쩍 ㅎㅎ, 웃고 만다.
그저, 글쎄, 그런가요. 좋은 일이었음 해요. 지금도, 나중에도,라고 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 할 것 같다.
부서를 옮겨오기 전 나는 어르신 부서에서 근 오 년을 근무했다.
평균 나이 팔십 대 초반, 한 세기 가까이 산, 구십 세가 넘는 분도 두 분이나 됐다.
이렇게 어르신을 만나 뵙다 보면, 어느 순간 '선생' 소리가 자꾸 머리에 맴돌 때가 있다.
고개 넘어 사는 김 씨 어르신은 나를 보면 꼭 "최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라 한다.
언제 한 번은 옆에 있던 다른 어르신이 조금 친근한 말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이를 듣던 김 씨 어르신은 "(그 어르신을 향해 아주 차갑고 무서운 말투로)
아니, 할머니. 그렇게 하면 안 돼. '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안 그래?"라고 했고
나는 괜히 머쓱해서 허허, 웃다 슬쩍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날 이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어르신은 나를 보면 입을 모아 '최 선생님'이라 한다.
젊은 시절, 김 씨 어르신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단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이긴 한가 보다.
아무튼, 김 씨 어르신은 나를 보면 줄곧
"선생님, 우리 최 선생님.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학생이 될게요."라고 했다.
듣던 나는 "아유, 어르신.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잘 듣고, 잘 배워야지요." 하면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할머니' 될게요."라고 껄껄 웃곤 했다. 김 씨 어르신 특유의 '할머니 유머'.
누가 더 잘 들어야지, 누가 더 배워야지, 하며 옥신각신, 한바탕 웃고 나면 늘 이런 마음이 든다.
나는 과연 '선생' 소리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에 가볍고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한 까닭은,
아마 '선생' 소리 앞에 자꾸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와도 같을 것 같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 그래서 가끔은 다 내려놓고 더는 이런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고 싶단 마음이 들 때마저 있다.
어떨 때는 그 고민이 삶의 일부분을 집어삼켜, 퇴근 이후에도 계속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도와야 할까,
지금의 '좋은' 뜻과 '좋은' 의도가 과연 '좋은' 결과로써 발현될 수 있을까.
지난날, 좋은 의도로서 했고 좋은 일이라는 믿음으로 했던 수도 없이 많은 실수, 실패.
또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좋은 의도, 의미, 마음, 믿음으로 좋은 '일'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사회사업가의 숙명을 따라가려 한다.
아직은 잘하고 싶다.
여전히 잘 돕고 싶다.
'선생'이란 말도, '좋은 일'이란 말도 나에게는 크고 무겁고 어렵고, 과분한 이름임을 알고 있지만,
아직은 아주 포기하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