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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밤 걷기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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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Aug 25. 2024

밤 걷기

10

  아까 혼자 지나온 길을 아이와 함께 걸었다. 골목 어귀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었고 가게 건물들을 지나자 주택가 틈에 자리 잡은 공용주차장이 나왔다. 좀 전에 지나친 곳이었다. 주차장 부스 옆에 세워진 낮은 담벼락. 그 위에 화분들이 늘어서 있었다. 담벼락 앞에 플라스틱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어서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이가 화분이 보이는 방향으로 의자를 돌렸다. 우리는 의자에 앉았다. 구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자주 나가시니?”

  “가끔.”

  “무섭지는 않고?”

  아이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젓더니 고양이, 라고 말했다. 처음 엄마가 밤에 집을 나갔던 날에도 아까 그 고양이가 왔다고 했다. 집 앞에서 울고 있으면 고양이가 꼭 자기를 찾아온다고. 나에게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고양이를 아이는 친구처럼 여겼다. 

  엄마가 자신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거라고, 아이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어쩌면 나의 엄마와 아빠가 나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제때 설명하지 못한 것도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게 최선의 방식은 아니었을지라도, 이 이유가 전부인 것도 아니었겠지만. 어린 나에게 전쟁과 죽음에 대해, 내 원래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것에 대해 상처를 남기지 않고 이해시키는 게 어렵다고 느꼈을지도 몰랐다. 대신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 가졌을 때 국수를 많이 먹어서, 그래서 니가 국수를 좋아하는 거다.”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엄마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얼굴을 내렸다.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엄마는 기억을 잃어 가는 아빠를 돌보고 나를 키웠다. 전쟁의 기억과 고통은 아빠에게만 속한 게 아닐 텐데.

  “또 아파?”

  아이가 물었다. 나는 좀 지나서야 아니라고 대답했다. 배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게도 무언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피곤이 몰려왔고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졸리구나?”

  아이가 물어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몸을 뒤로 뺐다. 손가락을 넓게 펴고 끝을 조금 구부려 아이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다. 오래전 나의 엄마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주말에는 부모님 집에 가서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또 하품이 나와 아이 몰래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졸리지?”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가 또 물어 왔다. 그렇다 한들 이 시간에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집 앞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가 겉으로는 괜찮은 척해도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번에는 정말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이런 감정을 아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뜨거운 손이 마음 한편을 쥐고 비트는 듯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내 안쪽 깊은 곳에서도 같은 두려움이 일어났다. 

  할머니에게 내가 아빠의 죽은 친구의 아이라는 말을 들은 후였다. 명절을 앞두고 엄마와 함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시장에 갔다. 규모가 큰 곳이라 장을 보다가 금방 피곤해졌다. 시장 어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엄마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나에게 짐을 보고 있으라고 말했다. 엄마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시장 천막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겁에 질려 울기 시작하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괜찮니? 무슨 일이야, 왜 울고 있니?”

  “자고 일어나니까 엄마가, 엄마가 없어.”

  나는 모르는 여자에게 안겨 울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반대쪽에서 뛰어와 시장이 하도 커서 한참 헤맸다고 말했다. 엄마가 나를 두고 가려고 했던 것인지,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내가 괜히 겁을 먹었던 것인지 정확히는 모른 채 나는 그날의 일을 잊으려고 했다. 그해 겨울 엄마에게서 국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내가 드리우고 있는 그늘 때문에 언제든 버려질지 모른다고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왔다. 언제든 삶이 파괴될지도 모른다고. 나에게는 그날들이 전쟁 속 같았다. 돌이켜 보면 엄마는 힘들게 꺼낸 말을 끝까지 지켰는데.

  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고무줄로 아이의 머리를 묶어 주고 손을 내렸다가 다시 아이의 어깨로 가져가 가만히 다독거렸다. 누군가 내 어깨를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들었을 때 앞에 선 이 층 건물의 불 켜진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집과 비슷하고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도 닮은 오래된 건물.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조금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하얀 커튼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이가 내 팔목에 손을 올렸다. 아이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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