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 문턱을 넘다 3

by 인아

내가 홀로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었을 때, 남편은 3개월 만에 재 이직에 성공했다. 이전 회사보다 페이도, 규모도 모두 더 나은 곳이었고 그와 반대로 거리는 더욱더 멀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그 이전의 회사 두 곳은 모두 경기도였다. 나 역시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10년 가까이 출퇴근을 하며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에 그 정도까지는 감수할 만 거리였다. 하지만 여러 개의 시를 넘어 도가 두 번이나 바뀌는 거리는 듣기만 해도 아찔했다. 남편은 자신 있다며 나를 설득했고 결국 서울에서 아산까지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이직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되어 그런지 남편은 본인의 페이스를 회복했다. 나 또한 가장 가까운 내 주변이 안정되니 함께 안정되어 갔다. 그 상황을 용기삼아 나는 정신과 진료사실을 알렸다. 말도 못 하고 혼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고 있던 사실에 남편은 꽤 놀랐었다. 조금이나마 더 나를 도와주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내가 다니던 병원은 집에서 도보로 20-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운전을 전혀 하지 못했고, 버스를 타기에도 애매한 위치였다. 무엇보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야 했기에 버스를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유모차를 밀면서 가면 도보 20분가량의 거리는 30분 이상으로 늘어나기 일쑤였다. 내가 예약한 시간에 맞춰 내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과병원의 특성상 긴 대기는 늘 있는 일이었다. 지루해서 몸부림치는 아이를 달래 가며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날씨가 좋은 날은 산책 삼아 쉬엄쉬엄 걸어가기 괜찮았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는 날도 있었다. 미세먼지 어플에서 최악이라는 글자와 함께 검은 방독면을 쓴 아이콘이 나타나면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비가 오면 무조건 병원예약을 취소해야 했으며, 폭염주의보가 뜬 날이나 미세먼지가 좋지 않은 날에는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약물의 효과는 물론 좋았지만 그렇다고 내 기분이 항상 좋음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아이에게 짜증을 낸 날이면 왜 약의 효과가 유지되지 않는지 불신했다. 이런 나의 생각에 의사는 사람은 누구나 짜증 내고 화낼 수 있다며 그런 감정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정신과 의사인 자신도 화를 내고 욱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나에겐 내 감정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아이를 향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 날이면 죄책감과 혐오감이 나를 둘러쌌다. 그래도 이전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 고무적이었다. 날씨를 핑계 삼아 점점 병원에 가지 않는 일이 생겼고 임의로 약을 중단했다가 먹는 일도 반복됐다. 그 사이 아이는 기관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되찾은 나의 개인시간은 항우울제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주었다. 약을 먹지 않고 몇 달의 시간을 보내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제 더 이상 치료가 필요치 않다고 여겼다.


갑자기 생겨난 개인시간은 예상치 못했던 감정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온전히 집에서만 아이를 육아했을 때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아이가 기관에 가면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해야지. 마트나 백화점도 구경하고 시내에 나가 혼자서 커피도 마셔야지. 하지만 마음속의 계획은 실천되지 않았고 나는 김장배추처럼 무력감에 절여져 갔다. 3살까지 열이 난 적이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아이는 4살에 기관에 가기 시작하면서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아동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하기도 했고 그토록 잘 방어했던 코로나에 함락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나 살자고 아이를 사지로 내몬 것만 같았기에 자괴감은 더 짙어졌다. 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날 점점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직 후 남편은 나와 아이가 아직 한밤중인 5시에 집에서 출발에 회사로 향했다. 엄마와 집에 있고 싶다고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끼니도 거른 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까지 누워있곤 했다. 그 어떤 것을 할 의욕도 없었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나는 다시 시들어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역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 하는 양육 스트레스 관리라는 부모교육을 듣게 되었다. 1회에 2시간씩 3주에 걸쳐 진행되는 강의였다. 정해진 시간에 어딘가 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은 생각 외로 활력 요소가 되어주었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육아의 고민거리를 말하는 것은 불편했다. 강의가 진행될수록 불편함이 더해져 갔는데 단순히 내가 낯을 가리는 성향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 강의실에는 강사를 포함해 열명에 가까운 [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 완전한 전업주부는 나뿐이었다. 모두 워킹맘이거나 휴직 중인 사람들이었다. 강의 내내 강사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정신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엄마들을 응원해 주었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지독한 자격지심을 느꼈다. 내 머릿속에는 [잉여인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패배자가 된 기분에 휩싸였다. 남편의 등에 기생하여 살고 있는 벌레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날 그런 생각에 들게 만드는 열등감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기 힘들었다. 세상에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으나 내가 빠진 구덩이는 혼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나 깊었다. 또다시 나는 날 심연에서 꺼내 줄 항우울제를 처방받으러 병원으로 향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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