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끝없는 터널을 걷고 있었다. 그 터널을 걷다가 죽던, 헤매다 죽던 종국에 내가 도달할 것은 죽음 밖에 없어 보였다. 뱃속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는 버틸 수 없겠구나 눈앞이 까마득했다.
이제야 말문이 트인 아이를 앞에 두고 창고 방으로 숨어 들어가 울었다. 하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6층짜리 빌라건물의 2층. 6층 옥상에서 떨어져 봤자 죽을 확률보다 불구가 될 확률이 더 클 것 같았다. 걸어서 20 여분 거리에 있는 한강. 한강은 어떨까? 1월이었고 날씨는 너무 추웠다. 차가운 한강 바람을 맞는 순간 떨어져 내릴 용기가 내 몸보다 먼저 추락할 것 같았다. 그때 내 눈에 뜨인 건 검은색 케이블 타이가 잔뜩 들어있는 지퍼백이었다. 복잡한 전선 따위를 정리해 두려고 집에 갖다 놓은 것이었다. 케이블 타이는 대략 15센티 정도. 넉넉하게 50여 개는 넘게 있었으니 잘만 엮으면 길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을 이용해서 지금 여기 있는 터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블 타이를 세 개 정도 연결해 보니 예상대로 길어졌다. 한 가지 방법을 ‘킵’ 해뒀단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최후의 플랜을 세워두니 조금 더 버틸 인내심이 생겨나는 지독한 아이러니.
어떤 날은 버틸 만했고, 또 어떤 때는 그날이 바로 디데이라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풍랑에 표류하는 낚싯배처럼 흔들거렸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계속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점점 커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작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나는 서서히 메말라갔다.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를 보는 게 기쁘면서도 내 안은 점점 죽어갔다. 희망은 없었고 의지 또한 없었다. 도중에 내릴 수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기분이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기대거나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외로웠고 힘들었고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나에겐 현실로부터의 도망이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살고 싶었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키워야 할 의무와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비빌 언덕이 되어 줘야 했다. 거대한 폭풍우까지는 무리더라도 어느 날의 장마 정도쯤은 내 품에서 피할 수 있게 해줘야 했다. 나는 최소한의 나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엄마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대한민국의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일명 정인이 사건이라고 불려지는 아동 학대 살인사건이다. 두 돌도 채 되지 못한 아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인하여 사망한 사건이었다. 나의 아이도 19년생이었고 정인이와는 불과 2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그 사건은 나에게,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 충격과 공분을 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티브이도 보지 못했던 나는 내 아이가 잠들면 밤마다 정인이 뉴스를 검색했다. 커뮤니티에서 정인이 사건에 대한 얘기를 사람들과 주고받으며 서로 불 같은 화를 뿜어냈다. 그것 외에 엄마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는 그 싱그러운 생명을 채 피워내지도 못하고 떠났고 어른이자 엄마인 우리는 슬펐고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저렇게 밝고 맑은 아이가 고통받다 떠났다는 사실은 잔인했다. 밤마다 나는 정인이를 생각하며 울며 기도했다. 다음 생에서는 제발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차라리 다음 생엔 나의 아이로 태어나길, 하늘에서만이라도 고통 없이 행복하길.
울며 기도하는 내 옆에서는 아이가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핸드폰 불빛에 희미하게 비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순간 전기에 감전된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 분노, 수치스러움, 절망감, 부끄러움 그리고 그 감정의 끝에는 다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죽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나는 나를 상처 주고 때리고 밟고 비난했다. 내가 타인이 되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엄마라 불릴 자격이 없는 나를 매일 마주하며 고통스러웠다. 끝도 빛도 없는 공간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뉴스 속의 아이를 그리 애달파하며 울고 화를 내고 기도하는 나는, 내 아이의 엄마였다. 내가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내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오직 나에게만 말할 수 있는 단어, 엄마. 다음 생엔 학대로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정인이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기도했던 나는 이미 그 순간에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아이의 엄마였다. 엄마의 자격이 없는 내 아이의 유일한 엄마였다. 그 사실이 내 머릿속을 관통한 그 순간 아이가 깰세라 이불로 얼굴을 틀어막고 오열했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은 파도처럼 몰려왔었고 아이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결혼에서 출산까지 내가 계획하지 않은 부분은 단 한 가지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스러웠었다. 내가 아이 때문에 고통받는 게 아니었구나, 아이가 나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나를 지독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은 여전히 아이 때문에 힘들었고, 어느 날은 그런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서 해결해 나가려고 했던 것 같다. 실질적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로지 가정 내에서만 아이를 육아하고 있었으며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야 한다는 선택지는 내 손으로 구겨버린 체 전전긍긍했었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의지했던 마음도 오히려 조금씩 놓아버리고 있었다. 남편 역시 결혼과 출산 이후로, 다시 말해서 본인이 부양해야 할 가족인 생긴 이래 처음으로 이직을 했다. 이전보다 더 좋은 조건의 페이였고 회사는 조금 더 멀어졌다. 멀어진 통근거리보다 새로운 조직에서의 적응이 쉽지 않았다.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았고 업무를 인수인계 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직을 달가워하지도 않았지만 다시 이전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남편을 말린 것도 나였다. 여기서 적응하지 못한다면 남편이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멀어진 거리만큼 육체적인 피로감이 쌓이고 육체적인 피로감보다 더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남편을 둘러싸고 있었다. 항상 내가 의지할 대상이 되어주었던 남편이 정신적으로 위태위태한 모습이 내 눈에 쉽게 포착되곤 했기에 나 죽을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남편의 어깨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와이프와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이의 생계까지 달려있었다. 그 어깨가 얼마나 무겁고 저릿했을지 감히 짐작됐었다. 그렇기에 최소한 나까지 걱정거리를 떠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편과 상의나 통보 없이 내 발로 정신과의 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