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미리 알아봐 둔 정신과로 첫 진료를 예약했다. 초진이기에 제일 빠른 진료가능 예약일까지는 3주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주변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구나 하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병원 홈페이지상에 기록된 의사의 약력이나 인사말도 꼼꼼하게 읽었고 나보다 먼저 정신과 진료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남자 의사이기에 아이를 키우며 겪는 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반, 소아진료도 병행한다는 점에서 나의 힘든 문제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반으로 첫 번째 신경정신과 진료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첫 질문부터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 나에게 물어봐 주길 기대했던 사람처럼, 오랫동안 고대했던 질문을 들었던 사람처럼 눈물을 터트렸다.
우는 것 외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기에 나는 처음 본 의사 앞에서 발가벗은 사람처럼 울었다. 그 당시 정신과 의사는 나의 새로운 동아줄이었고 나의 호박마차 요정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믿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죽고 싶어서 죽을 방법을 찾았던 나는 사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고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 홀로 발버둥 쳐야 했던 나는 그 누구라도 잡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난 최초의 신에게 고해하듯 의사에게 매달렸다.
진료를 보기 전에 막연하게 나의 병명을 화병이나 분노조절장애라고 생각했다. 쉽게 흥분했고 화가 났다. 항상 목 끝까지 화가 찰랑찰랑 잠겨 있었기에 누군가 꽃잎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하더라도 화가 폭발했다. 대부분 그 화의 대상자는 어린아이이거나 남편이었다. 몇 가지 심리검사와 문장완성 검사를 했다. 우울정도와 불안지수가 꽤 높다고 했다. 나의 병명은 우울증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병명이었다. 우울증과 높은 불안지수는 짝꿍과도 같은 존재라는 말도 들었다. 잠깐 의아했다. 나는 지금 우울한가? 내가 우울해서 여길 와있던가? 나는 나 자신이 기질적으로 우울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화와 분노였기에 잠시 그 병명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했었다.
진료를 보며 당연히 현재의 힘든 점에 대해 의사에게 얘기를 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왔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화, 분노는 유년시절과는 상관이 없는데도 낡은 상자 속에 처박아 둔 체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과거를 펼쳐 보여야 했다.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상처이자 가리고 싶었던 것들이 지금은 그저 그런 지나간 사실이 되었다는 것에 한편으론 담담했고 한편으론 착잡했다. 난 그동안 뭘 그렇게 숨기려고 노력했을까?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도 지금과 무관한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시절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도 아니었다. 현재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시절의 나를 꺼내야 했다. 그때의 나를 잘 다독여야 조금 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았지만 그럴 여유까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당장 감정을 조절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이를 돌봐야 했다. 나는 엄마이기에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선이었다.
푸록틴 캡슐 10미리로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매 진료마다 증상에 따라 20미리로 증량을 하기도 했고 아빌리파이나 스리반정을 추가하기도 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약물의 증량이나 추가 등의 변동사항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약물치료의 효과가 꽤 좋았던 것이었다. 보통 자신의 증상에 맞는 약물의 종류와 용량을 찾기 위해 한 달에서 세 달 정도는 지켜봐야 하고 그 사이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지 못한 내원자들은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 임의로 약을 끊기도 한다. 그렇지만 난 첫 복용부터 꽤 효과를 보았기에 꾸준히 내원하며 약물치료를 이어갔다. 약물의 효과가 나에게 잘 맞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쩌면 이 상태를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가 시너지를 효과를 낸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플라세보 이펙트처럼. 지독하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던 그 감정의 파도들이 고작 알약 몇 개로 차분해지는 사실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날 허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