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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준 Oct 10. 2024

바닥에 새겨진 흔적들

우연함이 만들어내는 재미

[사진 1], [사진 2]

우리가 살아가는 거리 바닥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것은 대개 정보를 담거나 알리기 위한 목적성이 강하다. [사진 1]의 경우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촬영된 것으로, 해당 기호가 바닥에 새겨진 이유는 바로 앞에 기차가 지나가는 거리였기 때문에 보행자에게 주의를 주기 위함이었다. [사진 2]의 경우는 파주시청 근처에서 촬영된 이미지로 근처에 횡단보도가 있음을 운전자에게 예고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큰 다이아몬드 기호를 도로에 새겨 넣은 것이다.


이렇듯 바닥에 무언가 새겨져 있다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차가 돌아다니는 도로라면 더더욱. 하지만 다음으로 소개될 이미지들은 무언가 새겨져 있긴 하지만 한눈에 목적성을 알 수 없어 관찰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이미지들이다.

[사진 3] | 세명대학교 민송도서관 입구 앞에서 촬영.

[사진 3]은 세명대학교 도서관 입구를 나오며 촬영한 이미지로, 발견한 순간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촬영부터 했던 이미지다. 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돌바닥에 무언가 새겨져 있기는 한데, 기호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한글 'ㄹ'의 윗부분이 잘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게 한글이 맞다면 폰트는 궁서체가 아닐까?


중요한 건 이것이 돌에 새겨져 있는 이유, 즉 목적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혹시나 대학교 도서관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목적이 있어 새겨진 것은 아닐까? 건축을 전공하진 않았기에 건축적인 지식에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직접 만져보며 추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촉감은 굳어버린 껌딱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약간은 고무 같은 재질로 느껴지기도 했다. 확실한 건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돌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근데 문제는 다음이다. 한참 구경을 한 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사진 4], [사진 5] | 세명대학교 민송도서관 입구 앞에서 촬영.

대학교 도서관의 입구는 꽤나 컸는데 위 이미지들이 꽤나 일정한 거리로 세 개의 스팟에 분포되어 새겨져 있었다.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무슨 용도가 있겠거니 대수롭게 넘겼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두 개의 이미지를 연달아 목격하니 과거에 무언가 확실한 용도가 있었을 거란 강한 추측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건축물 시공 과정에서 남겨진 일종의 기준점, 가이드라인이었거나, 하수구나 전선 연결부를 표시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타일이나 석재 시공의 가이드라인일 가능성도 있다. 근데 어떤 회사에서 저렇게 가이드라인을 공들여서 표시해 놓는가? 공사를 하는 회사에서 남겨놓은 흔적이라기엔 너무 공들인 느낌이다. [사진 5]만 봐도 필자는 처음에 신호등인 줄 알았다.


그렇다면, 과거 어떤 타일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을까? 미끄럼 방지 타일이었을 수도 있고, 줄을 서는 구역을 안내해 주는, 혹은 길을 안내해 주는 타일이 바닥에 설치되었다가 때진 흔적은 아닐까? 타일이 설치되어 있던 자리라는 해석이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모두 사각형 가운데에 문양처럼 생긴 것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각형 안에 위치한 문양들은 접착제가 굳어진 흔적이 아닐까?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에 새겨진 흔적 자체가 접착체가 굳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 3]의 'ㄹ'처럼 보이는 저 문양은 정말 우연하게 만들어진 기특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천 시리즈인 [사진 6], [사진 7] | 파주시청 부근, 프랑스 파리에서 각각 촬영.

위의 '도서관 삼총사' 이미지를 목격하니 이전부터 천천히 수집 중이었던 '우천 시리즈'들이 떠올라 갤러리에서 급히 가지고 나왔다. 지금보다 이미지가 충분히 수집이 된다면 <거리 다시보기>에 '우천 시리즈'가 소개되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소개해보려고 한다.


'우천 시리즈'에서는 비가 내린 뒤 거리에서 발생되는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찾아 나선다. '도서관 삼총사' 이미지와 '우천 시리즈'의 차이점이라면 '우천 시리즈'는 휘발성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위 이미지들은 비가 내린 다음날 거리를 걸으며 촬영한 것들로, 누군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오직 비, 자연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고유한 가치를 뽐낸다. 저러한 유형의 이미지를 목격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따라줘야 하는데, 도로의 각도(기울기)부터 날씨 온도에 따른 물의 증발 정도도로의 색이 물에 비해 어둡지 않아 관측하기 용이한지에 대한 여부, 가장 중요한 건 어느 시점에 관측자가 목격하는지에 따라 목격된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휘발성이 강한 이미지이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태가 크게 변화하며, 결과적으로는 '사라질 이미지'라는 결말을 가지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오래 품기란 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사진 6, 7]이 '도서관 삼총사'와 비슷한 점이라면 무언가 새겨진 형태라는 점, 그리고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점이다.

[사진 7] | 금촌역 뒤, 금촌천교 부근 산책로에서 촬영.

큰 비가 내린 뒤에는 항상 재미있는 이미지들이 거리에 놓이게 된다. [사진 7]은 비가 내린 뒤 생긴 진흙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에 의해 생긴 이미지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촬영했을 당시가 파주 지역에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린 후였다. 금촌역 뒤 산책로가 잠길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는데, 위 사진은 산책로에 물이 빠진 뒤에 촬영한 것이었다.


[사진 7] 역시 위 사진들과 비슷한 맥락의 이미지다. 돌바닥에 쌓인 진흙 위를 걸어 발바닥 모양이 새겨지게 되었다. [사진 6, 7]보다는 수명이 길겠지만, 역시나 조만간 없어질 이미지다. 다시 비가 온다면 씻겨 내려갈 수도 있고, 공무원들에 의해 진흙이 치워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시 내가 저 이미지를 촬영한 이유는 사람들이 해당 진흙을 어떻게 지나갔는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진흙에 새겨진 발바닥 모양만 보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다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저 발바닥들은 나에게 많은 힌트를 제공해 주었다. 여러모로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 중 하나였는데 이런 기회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 거리는 하나의 전시장과 같다. 우연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부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자연 발생적인 이미지부터 사연이 담긴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혹시나 글을 읽는 독자들도 길을 가다가 흥미로운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갤러리에 찍어놓은 것들이 있다면 촬영한 날짜와 촬영된 위치를 포함해 메일로 공유해 주면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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